8월 15일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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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방을 맞이한 1945년 8월 15일. 일본인들에게 이 날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태평양전쟁의 종식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8월 14일이나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2일이다. 왜 일본은 옥음방송(玉音放送)을 8월 15일에 내 보낸 것일까?
『8월 15일의 신화』는 '일본은 왜 8월 15일을 종전의 날로 기억하는가?'란 물음을 던지며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 '8월 15일'의 실체를 조명한다. 일본 천황의 '옥음방송', 신문의 종전보도, 역사교과서의 종전 기술 등을 통해 역사와 미디어, 미디어와 정치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며, '종전'이란 단어로 항복의 역사를 뒤덮어버린 일본사회를 고발한다.
미디어 학자인 저자는 부정확한 정보가 담긴 사진, 전혀 다른 풍경을 담은 사진, 연출된 듯한 사진들에 의문을 품고 다양한 미디어가 전후에 어떻게 국민들의 종전 기억을 구성해왔는지, 또 바꾸어왔는지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8월 15일에 부여하는 의미는 서로 달랐지만 '좌우의 이데올로기가 절충할 수 있는 균형점'으로 이용됐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천황의 종전조서 전문, 종전선언 후 일본인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등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들이 담겨 있습니다.
작가정보
지은이 사토 다쿠미(佐藤卓巳)는 196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1984년 교토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7~1989년에 독일 뮌헨대학 근대사연구소에서 수학했다. 그 후 교토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학신문연구소 사회정보연구소 조수, 도시샤대학 문학부 조교수를 지냈다. 현재 교토대학 대학원 교육학연구과 교수(전공-미디어 역사, 대중문화론)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대중선전의 신화』, 『현대 미디어 역사』, 『천황의 시대-국민대중잡지의 공공성』(일본 출판학회상 수상, 산토리학예상 수상), 『전후세대의 미디어 사회학』, 『언론통제-정보관, 스즈키』 등이 있다.
옮긴이 원용진(元容鎭)은 1957년 진해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했다. 1992년에 위스콘신-매디슨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신방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텔레비전 비평론』, 『광고문화비평』, 『한국언론민주화의 진단』 등이 있다.
번역 오카모토 마사미
옮긴이 오카모토 마사미(岡本昌己)는 1956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83년 호세이대학교 문학부 지리학과 통신교육 과정에 입학했고, 2000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편입, 졸업했으며, 2006년에 동 대학원 신방과를 졸업했다. 논문으로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관련 일본 신문보도의 차이와 변화」가 있다.
목차
- 종전조서 전문 4
한국어판 서문 9
머리말 17
일러두기 22
1부 미디어가 만든 종전의 기억
1장 815자의 8월 15일 조서 25
2장 짙은 갈색 기억, 《홋카이도신문》의 옥음사진 41
3장 8월 15일의 규슈 비행기 공장 51
4장 옥음사진이 자아내는 이야기 71
2부 항복기념일에서 종전기념일로, 단절을 연출하는 신문보도
1장 종전이란 무엇인가 93
2장 승자와 패자의 종전기념일 109
3장 창작되는 기억 125
4장 옥음의 기억에 뿌리내린 전몰자 추도식 141
3부 옥음방송의 내력, 전쟁 전후를 잇는 오봉 라디오 방송
1장 성령월과 8월 저널리즘 153
2장 옥음방송의 청취자 163
3장 오봉 라디오 방송의 지속된 저음, 고시엔 야구와 전몰영령 우란분회 법요 중계 179
4장 옥음신화와 전국 전몰자 추도식 203
4부 자명한 기억에서 애매한 역사로, 역사 교과서의 미디어학
1장 국정 교과서의 혼란과 검정 교과서의 성립 231
2장 종전 기술의 재편 259
3장 기억과 역사의 대치, 1963~1981년 265
4장 '역사화=정치화'하는 기억, 1982년 이후 273
5장 맺음말을 대신하여, 전후세대의 종전기념일을 289
인용문헌 297
옮긴이의 말 303
책 속으로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부에서는 조작된 8월 15일의 의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후, 다음 2, 3, 4부를 통해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 역사 교과서가 국민적 기억체제를 구축해간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2부. 항복기념일에서 종전기념일로, 단절을 연출하는 신문보도
전후 일본 신문들은 1955년의 ‘종전 10주년 특집’을 시작으로 새로운 전통을 수립한다. 이른바 ‘8월 저널리즘’이다. 8월이 되면 특히 신문지면들은 8월 저널리즘 메뉴로 넘친다. 신문지면을 전쟁과 관련된 각종 칼럼과 사설, 화보로 장식한다. 그 내용들은 ‘전후를 다시 읽는다’, ‘종전기념일에 생각한다―왜곡되는 신일본의 성격’, ‘포츠담 선언을 다시 읽는다’ 등이었다. 사회면들도 ‘종전일 그 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그로부터 10년’ 등의 기사들로 채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종전 관련 사진들을 소개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많은 사진들은 옥음방송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옥음방송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남태평양의 일본군 포로들, 궁성 앞에 엎드린 시민들, 집단 라디오 청취 후 고개를 숙인 청취자들, 군수 공장에서 눈물을 훔치는 정신대원들……. 이로써 전쟁의 끝은 연합국 앞에서의 항복 조인식이 있었던 그날이 아니었음을 신문들은 강조한다. 천황의 목소리 즉 옥음방송이 전쟁의 끝을 알리는 지표였음을 주지시킨다. 칼럼, 사설, 증언, 사진은 서로를 인용해가며 그날 ‘옥음이 있었고, 비로소 전쟁이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못박는다. 항복 장면들을 기억에서 몰아내고, 성스러운 결단으로 백성을 구한 천황의 옥음만이 종전의 기억에서 도드라지게 만든 것이다.
3부. 옥음방송의 내력, 전쟁 전후를 잇는 오봉 라디오 방송
종전의 기억을 8월 15일 옥음방송으로 못박는 데는 1950년대의 라디오도 한몫을 했다. 소리가 자본주의의 좋은 상품이 된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확실하게 알았던 탓일까. 1953년부터 NHK 라디오는 본격적으로 ‘8·15 종전기념일’ 편성을 시작했다. 7월에 주로 이뤄지던 <우란분회 법요>는 8월로 그 편성 자리를 옮겨갔다. GHQ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종교 프로그램을 편성할 요량으로 끼워넣던 기독교 프로그램은 이즈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불교행사인 우란법요, 8월 15일 양력 오봉을 전후한 봉오도리 방송의 중계는 전국의 NHK 지방국을 네트워크로 묶어냈다. 각 민영방송들도 이에 대응하는 편성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8월 15일이 되면 옥음방송과 관련된 인사들의 회고담이나 당시의 청취 모습을 회상하는 프로그램들로 편성했다. 전쟁 전 8월에 중계되고 편성되던 고시엔 고교 야구대회도 종전 이후에는 자숙의 의미로 중단되었으나 곧 재개되었고, 불교행사, 봉오도리, 종전기념방송 등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전쟁 전 일본의 8월 풍경을 전후에 재연해냈다. 편성이라는 형식을 통한 전쟁 전과 후의 연결을 완성해갔던 셈이다. 라디오를 통해서 8월 15일은 전쟁이 마감된 날로 기억되면서도 늘 전쟁 혹은 전쟁 이전과 연상되는 날로 각인되었다. 그 같은 흐름 속에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려준 9월 2일 미주리호에서의 항복 조인식 장면은 끼어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망각의 강에 줄을 대고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4부. 자명한 기억에서 애매한 역사로, 역사 교과서의 미디어학
신문이나 라디오의 ‘종전 10주년 기획’과 거의 시기를 같이해 역사 교과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옥음 체험을 강조했다. GHQ 통치하에서는 얼굴을 내밀지 못했던 용어, 사진, 내러티브들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이후 새로운 검정 교과서들을 통해 선을 뵈기 시작했다. 옥음방송이라고 직접 칭하지는 않았지만 성스러운 결단에 따른 방송, 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언급들이 등장했고, 그로써 전쟁이 마무리되었다는 식의 내러티브들이 등장했다. 어린 학생들의 회고가 역사 증언으로 교과서에 등장했지만, 대체로 회상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선택되었다. 교과서는 국민이 안심하고 이미지화할 수 있는 평균적이고 표준적인 ‘회상’ 만을 역사로 채용하고 있었다. 무수히 양산된 옥음 체험 중에서 교과서는 표준적인 체험을 기술할 뿐이었다. 이러한 ‘1955년 체제’의 교과서 정통성 위에 사람들은 스스로의 말로 ‘자유스럽게’ 종전체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회상은 교과서 기술을 뛰어넘지 못했다. 교과서의 역사 기술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 순간이며 사람들의 기억을 장악하게 된 결과다.
조심스럽게 주장되어야 할 매우 까다로운 화두가 던져졌다!
이 책은 종전 60주년이던 2005년에 출간되어, 일본 전후사 연구계 및 언론으로부터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한국어 번역본과는 2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지만, 그 사
출판사 서평
우연히 만난 한 장의 사진에 의문을 품고 추적을 시작하여
일본에서의 8·15의 의미를 새롭게 제기하는 문제의 책!
해마다 8월 15일이 다가오면 이미 지나가버린 전쟁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계표준’으로 보면 태평양전쟁의 종식은 옥음방송(玉音放送)이 있던 8월 15일에 이뤄지지 않았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8월 14일이나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2일이 종전의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8월 15일을 종전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왜일까?
이 책은 이 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일본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하 옥음방송), 당시 신문의 종전보도와 라디오 방송, 역사 교과서의 종전 기술 등을 살펴보며 ‘종전의 기억’이 일본에서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즉 전후(戰後) 일본이 어떻게 여론 정치를 펼쳐왔는지를 밝히고 있다.
일본은 왜, 부정확한 정보를 담은 사진이나 전혀 다른 풍경을 담은 사진들
또는 연출된 사진들을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 사진이라고 소개했을까?
전무파(戰無派)라 자처하는 히로시마 출신인 이 책의 저자 사토 다쿠미(일본 미디어 역사 연구자)는 우연히 만난 사진 한 장을 추적하면서 말문을 연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옥음방송을 듣고 쓰러져 우는 규슈 가시이 비행기 공장의 여자 정신대원의 사진. 그 사진의 정체에 저자는 의문을 표시했다. 사진은 1945년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작 그것이 일본인들의 주목을 끈 것은 전후 10년이 지난 1955년이었다. 1955년 《아시히신문》 종전 10주년 특집 기사에 등장했고, 그 이후로 가장 인기 있는 대표적인 옥음방송 사진이 되었다. 저자는 그 사진의 출처를 추적했지만, 몇몇 불확실한 증언만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사진을 입수한 신문사조차도 사진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신문은 구체적인 장소와 인물에 관한 정보를 사진 캡션으로 달았지만 그 정보의 근거를 밝히지는 못했다.
저자는 사진의 추적과정 중 얻은 증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규슈 가시이 비행기 공장의 그 사진뿐만 아니라, 역사책에 게재된 옥음방송 사진의 촬영자나 사진 속 인물에 관한 정보마저 부정확했다. 그가 추적한 다른 옥음방송 관련 사진들의 사정 역시 비슷했다. 옥음방송 다음 날인 8월 16일 《홋카이도신문》이나 《니시니혼신문》에 게재된 옥음사진들도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옥음방송을 듣는 모습으로 소개된 사진들은, 사실 1941년 12월 미국과의 전쟁 개시를 알리는 방송을 듣던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1941년 이후 매년 12월 8일 정오를 전후해 전 국민이 승리를 기원하는 묵도를 올렸는데, 바로 그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8월 15일 옥음방송을 듣는 모습인 양 소개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몇몇 사진은 카메라 기자의 요청으로 포즈를 취한 연출 사진으로 밝혀졌다. 왜 부정확한 정보를 담은 사진이나 전혀 다른 풍경을 담은 사진들, 또는 연출된 사진들을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 사진이라 소개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전후 일본의 종전에 대한 인식을 파헤쳐간다.
일본 우파에게는 ‘평화의 날’, 좌파에게는 ‘혁명의 날’
정치적 도구로 만들어진 ‘8월 15일’의 실체를 조명하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GHQ(연합군총사령부)의 일본 통치는 마감되었다.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의 손에 맡겨진 굴욕의 시기를 지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가파른 상승곡선을 탄 경제성장으로 일본은 이미 전쟁 전만큼의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떳떳한 일본’, ‘불가피했던 전쟁’, ‘대동아 공영을 위한 전쟁’이었음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옥음방송의 사진은 그 일환으로 반드시 필요했던, 없다면 꾸며서라도 내놓아야 했던 역사적 증거물이었다. 1945년 9월 2일 연합국의 목전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 역할을 해낼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역사와 기억의 선택 작업으로 8월 15일자 천황의 옥음은 전쟁의 끝을 알리는 소리로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전쟁 후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소리로 받아들여졌다. 옥음은 전쟁의 끝이면서 전후의 시작으로도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전쟁 전과 후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전쟁 전후사의 연속성 구축 작업이기도 했다. 저자는 그 작업의 하이라이트가 된 시기를 1955년으로 파악한다.
1955년 10월 사회당 내 좌우 파벌이 통합했고, 다음 달인 11월에 민주당과 자유당이 통합해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만들어졌다. 미소냉전시스템을 일본 국내 정치에 투영시킨 형태로 여야 체제가 이뤄진 셈이다.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자민당과 3분의 1을 차지하는 사회당과의 안정된 양립체제, 이른바 ‘55년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좌우 이념을 대변하는 양당은 8월 15일 옥음이 방송된 그날을 두고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우파는 ‘평화의 날’이 시작됐다며 일본의 원폭 피해를 강조했다.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잊고 원폭의 피해자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좌파는 천황에서 민중으로 정치권력이 넘어온 ‘혁명의 날’로 보고자 했다. 이렇게 8월 15일에 부여하는 의미는 각기 달랐지만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 8월 15일을 종전일로 삼고자 합의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대중매체가 그 소재를 발굴하고 재편성하여 ‘55년 국민적 기억체제’를 구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기본정보
ISBN | 9788958201038 |
---|---|
발행(출시)일자 | 2007년 08월 06일 |
쪽수 | 315쪽 |
크기 |
153 * 224
mm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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