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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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문장들이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_김도영(〈82년생 김지영〉 영화감독)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어른의 맛」 수록
작가정보
목차
- 어른의 맛 … 009
두고 온 것 … 039
버려진 지대에서 … 065
후암 이후 … 091
낙산 … 117
스모그를 뚫고 … 139
더러운 물탱크 … 163
곡부 이후 … 181
라플린 … 209
해설│황예인(문학평론가)
결국 누구도 도망가지 않았다 … 239
작가의 말 … 259
책 속으로
승신은 수연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N시에 살 때처럼 침대에 누워 어깨를 안고 서로의 뺨을 붙였다 떼었다. 문득 천장에 매달아놓은 드림캐처가 보였다. 승신은 더이상 호연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또 남편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건 그냥 저 드림캐처의 동그란 고리 같은 것이라고 하고 내버려두기로 했다.
수연은 닭똥 냄새 지독하던 양계장 사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신의 팔베개 안에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혹시 지진이 나서 집이 무너지면 어쩌지. 그렇게 되면 날 꼭 찾으러 와.(「어른의 맛」, 35~36쪽)
파라솔 아래에서 술을 마시던 애들이 몸을 밀치며 싸우고 있었다. 한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밀고 소리를 지르고 팔을 뻗어올렸다. 삶은 저애들을 더 비관적으로 만들 거야. 승신은 애들이 살면 살수록 더 비관적으로 변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삶이 사람들을 더 비관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어른의 맛」, 36쪽)
승신은 잘 아는 길을 걷는 것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앞을 향해 계속 걸어나갔다. (…)
그리고 갑자기 흙 한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입속의 수분을 모두 다 빨아들이는 흙의 맛은 승신이 언젠가 마카오에서 먹었던 비스킷의 맛을 떠올리게 했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이 먹는, 마치 황사를 삼키는 것 같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아 어른의 맛이라고 했던 그 아몬드 비스킷의 맛이었다.(「어른의 맛」, 37쪽)
소희는 가끔 억울했다. 그러다가도 은수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달라졌다. 내 딸은 감독이다. 내 딸은 중요한 일을 한다. 내가 저애를 낳았다. 은수는 전보다 흰 머리칼이 늘었고 팔자주름도 짙어졌다. 담배를 피우는 탓에 피부는 엉망이었고, 가릴 수 없이 튀어나온 뱃살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은수는 뭐라고 말해도 부족한, 소희에게는 세상에 단 하나 있는 그 무엇이었다.(「버려진 지대에서」, 72~73쪽)
엄마보다 내가 먼저 죽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나 죽는 걸 지켜봐주면 안 무서울 것 같아. 은수는 가끔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고 E선배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이사하던 날 엄마를 찍은 영상의 일부를 첨부 파일로 보냈다. 답장은 밤 아홉시쯤 도착했다. 이런저런 말 끝에, 전과 달리 네 영상이 차분하고 따뜻해졌다고 적혀 있었다. 별것도 아닌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은수는 피식 웃었다. 상처 난 얼굴이 땅기고 아팠다.(「버려진 지대에서」, 89~90쪽)
스모그만 걷힌다면, 오늘밤만 무사히 지난다면 아무 문제 없다고 중얼거리며 지영은 바로 눈앞도 보이지 않는 다리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이 모든 것이 다 보인다는 듯, 지영의 몸을 툭 치고 다리 위를 가로질렀다. 순간 개의 혀가 지영의 손을 핥고 지나갔다. 지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녀의 모습은 스모그에 지워져버렸다.(「스모그를 뚫고」, 162쪽)
출판사 서평
희뿌연 스모그 너머에 두고 온 것을 찾아
길을 되짚고 헤매고 끝끝내 걸어나가는 이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어른의 맛」의 주인공 ‘승신’은 ‘호연’과 오랜 불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부모 중 한 명이 자살했다는 공통점과 그로 인한 불안감으로 강하게 결속된 둘은 사랑이나 욕망 대신 재해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불안만을 나눌 뿐이다. 이런 관계와 삶에 권태를 느끼던 승신은 어느 날 어렸을 적 친구 ‘수연’의 연락을 받고 그의 집을 방문한다. 양계장을 운영하던 수연의 집이 조류독감으로 짐작되는 바이러스 때문에 이사를 가면서 헤어진 지 수십 년 만의 일이다. 승신은 호연과 나누지 못했던 누추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수연과 나누고 어두운 길을 나선다.
「두고 온 것」의 ‘민수’는 아내 ‘진영’과 과거에 묵었던, 지금은 폐허가 된 ‘H호텔’ 안을 헤매는 중이다. 민수는 언젠가부터 이상행동을 보이다 결국 폐쇄병동에 입원한 진영을 예전으로 되돌릴 실마리를 그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그가 마주하는 것은 호텔처럼 무너져내린 자신의 모습뿐이다. 외국에 보낼 중요한 상품 샘플을 잃어버린 뒤 해고당한 민수는 그 때문에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진영과 다를 바 없이 착란을 일으키고,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잊은 채 호텔 안을 맴돈다.
개인적 불행을 겪고 정처없이 떠도는 인물들의 모습은 「낙산」과 「스모그를 뚫고」에서도 이어진다. 「낙산」의 화자 ‘나’는 임신중단 수술을 받은 뒤 낙산 일대를 배회하며 그곳의 풍경을 관망한다. 인근의 절벽마을에 위치한 ‘나’의 원룸은 열악하기 짝이 없고, 남자친구와 함께 십 년을 벌어야 낡은 빌라를 전세로 얻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삶은 여유가 없다. 「스모그를 뚫고」의 ‘지영’과 ‘상혁’ 부부 또한 구 주택단지에 살며 신도시 고층 아파트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마주하는 것은 위협적인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옛 애인과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짐승들처럼 자신도 땅속에 파묻힐지 모른다는 공포뿐이다.
그런가 하면 「후암 이후」와 「더러운 물탱크」는 모두 실직을 겪은 중년 여성 화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후암 이후」에서 “후배들에게 양보”(108쪽)하라는 말과 함께 해고당한 ‘영주’는 부동산중개사인 친구 대신 부동산을 관리하며 비어 있는 남의 회사에 무단 침입하곤 한다. 어느 날, 그는 손님으로 방문했던 한 여성이 무허가주택의 방을 무단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에 그곳으로 향하고,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잠든 여성의 모습에 자신을 겹쳐 본다. 역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받은 「더러운 물탱크」의 ‘미스 수’는 대표가 건넨 “이제 자기 길 가”(169쪽)라는 말에 시청 인근을 서성이다 ‘극지연구소’행 버스에 오르지만, 그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쓰레깃더미가 쌓여 있는 흉한 공터이다.
이처럼 표류하는 인물들을 둘러싼 현실은 마치 막막한 스모그와도 같다. 거기에는 미세먼지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부터 조류독감이나 구제역과 같은 바이러스, 질환이나 실직 등 개인에게 닥친 불행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난이 배음처럼 깔려 있다. 이 모든 재난이 직조해낸 짙은 스모그의 장막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조밀하고 두텁다.
장막을 걷고 저 너머
두고 온 이후의 삶을 향해
그러나 『두고 온 것』의 인물들은 그 너머로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 「버려진 지대에서」에서 중년에 접어든 다큐멘터리 작가 ‘은수’는 노년의 엄마 ‘소희’와 함께 옛 공업도시로 ‘다크 투어리즘’을 떠난다. 제 몫의 삶을 지탱하는 것도 버거운 은수는 엄마를 살뜰히 챙길 여력이 없고, 가정폭력으로 남편과 이혼한 뒤 홀로 은수를 키워낸 소희는 자신에게 무심한 딸이 섭섭하다. 둘은 과거 모습 그대로 버려진 도시를 거닐며 서로의 삶을 돌아본다. 버려진 지대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소희는 ‘산림보전지구’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꾸리기로 하고, 은수는 엄마를 찍은 영상에 대해 “전과 달리 네 영상이 차분하고 따뜻해졌다”(89~90쪽)는 동료의 말을 듣고 웃음 짓는다.
소설집 끝에 나란히 배치된 「곡부 이후」와 「라플린」도 그처럼 제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인물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곡부 이후」의 ‘진석’은 중국 곡부에서 실종된 ‘정대리’를 찾아 그의 종적을 되짚는다. 그 막막한 여정 속에서 그는 회사가 무섭다고 말하던 정대리를 점차 이해하고, 애써 외면하고 숨기려 했던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진석은 정대리가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대로 꼭 공수병 주사를 맞겠다고 다짐했다. 왠지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누런 땅콩버터 빛깔의 황하가 저기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 말고 다른 점은, 변한 것은 없었다. 그뿐이었다.(208쪽)
쇠락한 사막도시에서 가이드 일을 하며 지내는 「라플린」의 ‘나’는 햇빛을 받으면 상태가 악화되는 병 ‘루푸스’를 앓고 있다. 브로커의 의뢰로 죽음을 앞둔 노인 부부를 유기하는 일을 맡은 ‘나’는 도시를 순례한 끝에 돌아와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지만, 그를 찾아온 것은 죽음이 아닌 아침이다. 일출을 바라보던 그는 그다음의 아침도 맞이할 것을 다짐한다.
모텔방에 태양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저씨 일어나요, 일어나. 저기 윈드 스콜피온이 왔어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라플린의 일출 시간이었다. 그들에게 라플린의 일출을 보여주지 않은 건 명백한 실수였다. 다음 고객에게는 반드시 라플린의 일출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236쪽)
저마다 ‘두고 온 것’을 찾아 길 위를 헤매는 인물들은 끝내 자신이 두고 온 것을 되찾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강영숙은 그 사실을 짚어 보이기보다 그저 길을 걷는 그들의 모습 자체를 끈질기게 응시한다. 그 시선을 좇다보면 어느 순간 두고 온 ‘것’은 희미해지고, 두고 온 ‘이후’의 걸음만이 우리 앞에 선명해진다. 그것은 어디에 무엇을 두고 왔든, 다시금 “잘 아는 길을 걷는 것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어른의 맛」, 37쪽)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두고 온 것’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남겨두고 떠나온 것’이 될 때, 『두고 온 것』은 결국 길을 되짚고 헤매면서도 그 ‘이후’를 향해 걸어나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평론가 황예인의 말처럼 “낙관과 긍정, 비관과 체념 그 어떤 단어로도 잘 잡히지 않는 독특한-그냥 여기에 똑바로 서서 그 무엇도 외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가겠다는”(해설, 257쪽) 태도로 꿋꿋하게, 결코 도망치지 않고서 살아나가는 이야기가.
◆
책을 받자마자 밤새도록 읽었다. 문장들이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이 책 안의 인물들을 잘 알고 있다. 낯선 곳에서 혹은 익숙한 곳에서 내가 만났고 내가 사랑했고 내가 외면했던 사람들이자 나 자신이었다. 그들의 심장에 머리에 자궁에 팔다리에 나 있는 검고 깊은 구멍들은 심연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입안의 모래알 같은 그 씁쓸하고 서걱거리는 구멍들을 음미하다 해가 떠올랐다. 문득 나는 내 가슴에도 작은 구멍이 나 있음을 눈치챘다. 오랫동안 덮어놓고 잊어버렸던 그 구멍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_김도영(〈82년생 김지영〉 영화감독)
세상 곳곳의 흥망성쇠를 초조함 없이 바라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꼼짝없이 이를 터전 삼아 살아가야 하니까. 하지만 강영숙은 낙관과 긍정, 비관과 체념 그 어떤 단어로도 잘 잡히지 않는 독특한-그냥 여기에 똑바로 서서 그 무엇도 외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가겠다는-태도로 이를 해내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세상 속 인간이란, 일출 속 윈드 스콜피온(「라플린」) 같은 게 아닐까. 작가는 루푸스를 앓고 있어 절대적으로 햇빛을 피해야만 하는 인물에게 태양이 작열하는 라플린의 가이드를 맡겨두었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지만 살아서 미래의 계획을 세운다. 다음 가이드 때는 틀림없이 일출을 보여주겠다고. 윈드 스콜피온의 또다른 이름은 태양으로부터 도망친 자라는 뜻을 가진 솔리푸개Solifugae. 결국 누구도 도망가지 않았다. _황예인(문학평론가)
◆
다만 무엇이든 작은 것이라도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한 관찰이 전부인, 스스로 쓰는 부고장 같은, 아직 이야기가 되지 못한 소설들을 한 장의 엽서에 담았다. 늘 그렇듯이 이번 엽서의 테마도 미진한 나 자신이다. 다음에는 더 많이 기록하되, 지금 여기 있는 수많은 실수들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_‘작가의 말’에서
기본정보
ISBN | 978895468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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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출시)일자 | 2021년 12월 10일 |
쪽수 | 264쪽 |
크기 |
134 * 200
* 23
mm
/ 317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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