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다. 가히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2달 가량을 버틴 한줌도 안되는 비잔티움군. 시시각각 몰려오는 대군을 지휘하여 무적의 성벽을 압박하는 오스만군.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혹은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제국과 함께 죽으며 신화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팽창기에 새로운 바람을 넣었다. 비잔티움사의 볼모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조차 콘스탄티노플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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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다. 가히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2달 가량을 버틴 한줌도 안되는 비잔티움군. 시시각각 몰려오는 대군을 지휘하여 무적의 성벽을 압박하는 오스만군.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혹은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제국과 함께 죽으며 신화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팽창기에 새로운 바람을 넣었다. 비잔티움사의 볼모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조차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다루는 서적은 여러권이다.
그 서적들 중 하나는 김형오 前 국회의장의 <술탄과 황제>이다. 필자가 리뷰할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의 원작에 해당된다.
필자는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를 리뷰하기 전에 원작에 해당되는 <술탄과 황제>를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원작을 두고 있는 창작물의 한계상 그 묘사의 자유도가 원작에 구속되기 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필자가 빌릴 수 있던 책은 2016년의 개정판인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가 아닌 2012년의 구작 <술탄과 황제>였다.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의 원작이 정확히 개정판인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인 만큼 이 리뷰의 원작에 대한 이해도에 어느정도 한계가 있을 예정이다.
(평가만을 원하시는 분들은 바로 4번으로 스킵할 수 있습니다.)
2. 원작 <술탄과 황제>를 읽으며
네이버의 역사 동호인들의 모임인 부흥 카페에서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의 서평 이벤트를 발견했을 때 필자는 가히 신세계를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원래부터 비잔티움사에 매료되어 있던 사람으로서 비잔티움사의 볼모지인 한국에서, 그것도 국회의장이나 했었던 정치인이 열정만을 갖고 1453년의 공성전을 그리는 소설을 집필해 만화판으로까지 각색되었다는게 굉장히 비현실적이었다. 그 날부터 이 책의 서평을 쓰고 싶었으며 원작인 <술탄과 황제> 또한 읽겠노라 결심했다.
먼저 만화판 2권을 읽고, 지난 이주간 <술탄과 황제>를 완독했다. 할말이 많지만 이 서평은 <술탄과 황제>의 서평이 아님으로 최대한 짧게 다루겠다.
솔직히 말해서, <술탄과 황제>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상당한 기대를 하고 들어갔다는 점이 독이 되었던 것같다. 필자는 내용을 읽기 먼저 책의 부록을 먼저 읽었다. 부록에서 김형오 前의장은 책을 집필하기 위한 여러 자료들을 제기했는데 꽤 놀라웠다. 동로마 멸망기 4대 사가로 꼽히는 두카스, 할코콘딜리스, 크리토불로스, 프란치스(작중 스프란체스)를 모두 참고했다고 밝힌 것은 물론이고 그외 여러 사료와 연구 자료들을 제시했으며, 이스탄불에 수차례 답사갔다고 한다. 필자의 <술탄과 황제>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로 높아지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용은 학자도, 작가도 아닌 김형오 前의장의 한계가 역력히 느껴졌다.
<술탄과 황제>는 설정상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발견된 비잔티움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일기와 이 일기에 대한 답장으로 집필하는 메흐메드 2세의 비망록을 교차하며 내용을 진행한다. 즉, 15세기의 두 인물의 집필물을 표방해서 전개하는 역사 소설이다. 문제는 수많은 관념적 오류로 인해서 실제 인문들의 집필물이라는 설정에 대한 몰입도가 번번히 깨져나간다는 점이다.
가령 술탄과 황제 모두 서기를 남용하는데 비잔티움이든 오스만이든 서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제4차 십자군'(pg. 83), '백년 전쟁' 같은 현대의 사건 명칭을 쓰는데에도 당대인들이 거리낌없다. 특히 '백년 전쟁'은 당대 시점인 1453년 5월 10일에 여전히 지속되어 있던 전쟁으로 결코 당대인으로서 쓸 수 없는 명칭이다.
가장 심각한 부분은 16세기에 비로소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물들이 '비잔틴 제국'이라는 명칭을 쓴다는 점이었다. 그외에도 '게릴라' (pg. 117), '킬로미터' (pg. 99), '말라리아' (pg. 118)같은 현대어들의 거리낌없는 사용도 15세기 인물들의 집필물이라는 설정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역사" 소설로서 실격인 부분이다.
다른 심각한 문제를 꼽자면, 재미있는 소설의 중추가 되는 중심적 서사와 조연들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일기와 비망록 형식을 빌려 하루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알리지만, 서술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그다지 느낄 수 없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처음부터 절망하고 있고, 메흐메드 2세는 처음부터 기세등등하다. 꾸역꾸역 결전의 날인 5월 29일로 가고 있지만 연결된 서사로 결전의 날로 달려가지 않고 마치 하루하루가 따로 노는 느낌이다. 서사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내용이 늘어지고 더불어 재미도 없다.
등장하는 인물은 사실상 황제와 술탄 밖에 없다. 김형오 前의장의 의도가 원래 두 인물의 리더쉽 다툼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쳤다. 황제의 측근에 해당되는 프란치스(작중 스프란체스)도 일기에서는 제대로된 대사가 없다. 황제의 측근이자 친우라는 설정이 그저 설정으로만 남는 느낌이다. 술탄쪽에서 그나마 자주 등장하는 찬달리르 할릴은 프란치스와 달리 대사가 존재하지만 메흐메드의 할릴에 대한 증오를 중심 서사에 섞지 못한 탓에 그저 개별적인 이벤트로만 등장한다. 메흐메드의 할릴에 대한 증오가 단계적으로 상승하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고 처음부터 증오한지라 결국 그다지 의미있는 전개를 제공하지 못한다.
김형오 前의장의 노력과 열정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설로서 <술탄과 황제>는 굉장히 재미가 없었다. 이 리뷰를 위해서가 아니였다면 다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3. 그래서 이게 만화판의 평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만화판에 대해서 깊이 들어가기 전에 짧게 답하자면, 위에서 지적한 <술탄과 황제>의 문제점들이 만화판에서 상당부분 해소되었기 때문에 원작의 문제점들을 열거할 필요가 있었다.
<술탄과 황제>와 비교하자면:
관념적인 오류는 여전히 존재한다. 당대인들이 썼을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아닌 원작처럼 '비잔틴 제국'이라는 명칭을 쓰며, 원작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오류인 '알라신' (알라는 이미 신을 뜻하며 알라신은 같은 단어의 중복이다)같은 오류가 등장한다 (2권 pg. 152). 하지만 개정판인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의 영향인지 몰라도 거의 매 페이지마다 이런 오류를 발견할 수 있던 것에 비해 그 수가 비교적 줄어든 느낌이다.
그리고 순전히 텍스트 뿐이라 이런 오류가 눈에 확 들어와서 몰입도를 해쳤던 소설과 달리 만화판은 아기자기한 그림에 시선이 분산된 덕분에 그런 오류를 발견하더라도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기 바빴다.
다른 큰 차이라면, 가상의 일기와 비망록이라는 장치는 스토리상으로 여전히 등장하지만 사실상 3인칭으로 내용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15세기 인물의 집필물이라는 점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몰입감이 부재했던 소설의 단점을 완전히 도려낸 셈이다. 필자가 꼽는 조한 작가의 신의 한 수라 생각한다.
중심 서사의 문제는 사실상 해소되었고, 조연의 부재는 일정 부분 나아졌다. 소설에서 불필요하게 느껴진 전개들이 모조리 제거되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주요 사건들 위주로 내용이 전개되다보니 스피디한 전개가 가능해졌다. 소설은 5월 29일을 향해 그저 꾸역꾸역 나아가는 느낌이라면 만화판은 함락이라는 종막을 향해 서로 치고박는 달려가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가령 마르마라 해전의 비잔티움의 극적인 승리를 묘사한 이후, 오스만의 기상천외한 금각만 진입을 전개함으로서 비잔티움 측의 충격을 묘사했으며 모든 것이 절망적이다 싶은 순간에도 오스만의 공세를 두차례 저지함으로서 제국의 저력을 묘사했다. 이런 주요 전개들이 재미없는, 불필요한 서술에 묻힌 소설판과 달리 불필요한 부분을 대부분 청산해서 전개의 설득력을 부여한 느낌이다.
조연의 부재는 비잔티움측에서 프란치스, 주스티니아니가, 오스만 측에서는 찬달리르 할릴이 꾸준히 등장함으로서 어느정도 해소해냈다. 물론 어느정도의 해소에 불과하다. 주스티니아니와 프란치스는 1차원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프란치스는 충실한 신하에 주스티아니는 순박한 장군이다. 할릴 또한 마찬가지다. 메흐메드의 위업에 방해하는 내부의 적, 딱 그 정도의 묘사만이 주어진다. 복잡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살아숨쉬는 인물이 아닌 그저 1차원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서사의 필요에 따라서 소모되는 유형의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런 조연조차도 없었으니 발전이 아닐 수가 없다.
4.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를 평하며: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는 1권과 2권으로 나뉘어졌다. 1권은 주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시각에서 전개되며, 2권은 주로 메흐메드 2세의 시각에서 전개된다. 1권은 황제의 권인 반면 2권은 술탄의 권인 셈이다. 1권에서는 마냥 무적의 빌런같이 느껴졌던 메흐메드의 인간적인, 개인적인 면모와 실제로 함락에 도달하기까지의 고난을 2권에서 전개함으로서 중립적인 시각을 더하는데 더불어 둘의 입장차 또한 더욱 강렬히 느껴졌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조한 작가의 그림 또한 눈을 즐겁게 했다. 대개로 필력이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주로 미사여구의 향연으로 흥미를 돋구려는 느낌이 강했던 소설판과 달리 역동적인 그림과 연출 덕분에 술술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2번 항목과 3번 항목을 걸쳐서 강조했듯이 역사적 디테일이 매우 부족했던 원작의 문제점을 이런 그림으로 중화할 수 있었다. 그외에도 서사성과 조연의 부재로 매우 늘어졌던 원작과 달리 이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소해서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철저한 고증을 얘기한 것과 달리 고증 면에서 여러군데 지적할 수 밖에 없다. <술탄과 황제>에서도 헝가리의 섭정 후녀디와 정전협정을 맺었다고 언급한 것과 달리 만화판에서는 동맹을 맺었다는 오류가 있다 (2권 pg. 178). 그리고 소설판과 공동으로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가 되면서 아야 소피아가 되었다고 서술하는데 (2권 pg. 181) 아야 소피아는 하기아 소피아를 현대식 그리스어로 읽은 표기법에 불과하다. 인물 묘사에서도 오류가 있는데, 수염없는 젊은 청년으로 묘사된 프란치스는 실상 콘스탄티노스 11세보다 4살이나 더 많은 중년으로 그려지는게 맞다.
총평하자면, 열정에 불구하고 소설로서 범작 이하라 느껴졌던 <술탄과 황제>와 달리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는 비잔티움사와 오스만사에 입문하는데 최적의 구성을 갖춘 왕도적인 작품이다. 황제와 술탄의 비망록이라는 가상의 장치 외에는 실제 역사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하는데 아기자기한 그림과 연출에 술술 읽힌다는 점 만큼은 높이 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술탄과 황제>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지만 비잔티움사의 볼모지인 한국에 이렇게 입문에 용이한 역사 만화를 주었다는 점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게 평하고 싶어졌다.
평점으로 4/5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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