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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고요하지 않다 2

이종찬 저자(글)
한울 · 2015년 0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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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 제2권. 이종찬의 80년 삶은 대한민국의 시간과 고스란히 함께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후손으로 상하이에서 태어나 한국 정치 1번지 종로ㆍ중구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오랫동안 꿈꾸었던 수평적 정권 교체의 주역이 되어 김대중 정부의 국가정보원장에 이르기까지, 이종찬이 걸어온 80년의 삶과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한국 정치의 민낯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기록했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종찬

저자 이종찬은 호는 삼인(森人)이다.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아버지 이규학(이회영의 아들)과 어머니 조계진(대원군의 외손녀)의 3남으로 태어나 광복 이후 가족과 함께 귀국해 서울에 정착했다.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제16기로 입교해 졸업과 함께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초등학교에서 만난 윤장순과 소위 시절에 결혼해 이후 1남 2녀를 두었다.
1972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중국의 행정제도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3년부터 영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해, 중앙정보부 국제문제담당 부국장, 총무국장, 기조실장을 두루 거치면서 10ㆍ26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 개혁에 앞장섰다.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하게 되면서 중앙정보부를 떠났으며,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서울 종로ㆍ중구)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제14대 국회의원까지 4선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 국회 운영위원장,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한중문화협회 회장, 정무1장관, 당 사무총장 등 중책을 역임했다.
3당 합당 이후 1992년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불공정 경선에 항의해 경선을 거부하고 탈당했다. 같은 해 새한국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 및 대통령 후보에 선임되어 대선에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부총재가 되어 1997년 제15대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야 간 정권 인수ㆍ인계 작업을 지휘했다.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명칭 변경) 부장으로 취임해 17여 년 만에 국가 정보기관으로 돌아왔다. 1999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로 위촉되었으며, 2000년 새정치국민회의가 해체됨과 동시에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새천년민주당 고문직과 서울 종로지구당 위원장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 동북아경제연구소(Northeast Economic Forum)와 하버드 대학 한국학연구소(Korea Institute)에서 한국의 물류 발전 가능성 등에 관해 연구했다. 2005년 한국선진화포럼 창립에 참여해 이사장으로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는 IBC(International Business Center)포럼의 이사장으로도 재직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독립운동사를 기리는 데도 각별한 애정을 쏟아온 이종찬은, 국회의원 시절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추진위원과 민주정의당 민족사관정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올바른 역사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조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우당기념관을 세우고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를 창립했으며, 현재도 우당장학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가족을 후원하고 있다. 2005년에는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2015년부터는 사단법인 광복회 이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념하고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보국훈장 삼일장, 홍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영국 정부의 CBE(Commander of British Empire) 훈장을 수여받았다. 저서로는 『민족의 종을 울리며 민주의 탑을 쌓으며』(1987), 『개혁과 온건주의』(1987), 『무엇을 말했는가: 이종찬 의원 국회발언 모음』(1992), 『디지털로 확 바꿔라』(2000), 『세계로 가는 길목을 잡아라』(2002) 등이 있다.

목차

  • 9_ ‘정치 복원’ 시대
    2ㆍ12 총선에서 ‘민심의 홍수’를 만나다 / 전례 없는 개원 협상: ‘대화’로 ‘돌파구’를 마련하다 / 학원안정법의 희생양들 / 노태우, ‘박종철 사건’으로 경쟁자들 정리 / ‘6월 드라마’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 / ‘지는 해’의 착각, ‘뜨는 해’의 술수 / “소선거구제는 망국적 제도!” / 정말 힘들게 오른 ‘3선 고지’ / ‘여소야대’의 뜨거운 맛 / ‘중간평가’로 정국 돌파하라 했건만 / 징검다리 ‘동해 재선거’

    10_ 망국적 3당 합당
    ‘허공의 메아리’ 혹은 역린 / 무력하게 지켜본 3당 합당

    11_ 민주자유당 대선 후보 경선
    제14대 총선 참패와 김영삼의 ‘국면 뒤집기’ / 청와대의 ‘박태준 비토’ / 김종필의 밀약 / 민정계 후보 단일화 / 경선 전초전 / “김영삼과 김종필의 시대는 갔다” / 아내가 김옥숙 여사를 만나다 / 최후의 선택을 향해 /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12_ 새로운 모색
    ‘새정치모임’ 결성과 YS의 ‘백기 투항’ 요구 / ‘독립운동 세력이 왜 퇴조했는지 알겠다!’ / 신당 창당 작업과 김우중의 아리송한 행보 / 새한국당 창당: ‘수평적 정권 교체’를 위해 / 눈물의 합당 / 처절한 파탄 / ‘야당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 민주당 합류: ‘정치 초심’으로 돌아가기 / 1995년 지방선거의 명암

    13_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15대 총선 패배를 딛고 대선기획팀을 꾸리다 / DJ 비서실장직을 고사하다 / 야권 단일화 작업에 끼어든 JP의 ‘정치적 음모’ / ‘DJP’를 넘어 ‘DJT’로! / ‘준비된 대통령’론으로 ‘비자금’ 파고를 넘다 / 외래형 책사 vs. 토착형 책사 / 마지막 고빗길 ‘외환 사태’

    14_ 헌정 사상 최초의 인수위 활동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의 나날들 / 사상 첫 정권인수위원회의 명과 암 / ‘국민의 정부’의 새 지평을 열다

    15_ 국정원에서 바라본 세상
    17년 5개월 만의 귀향 / 북풍과 총풍의 전모 / IMF 사태에 자극받아 국제경제조사연구소 신설: 경제 시스템 붕괴되면 국가 안보도 동반 약화 / 북한 읽기의 어려움 / 국내정보에서 손 떼기는 쉽지 않았다: 방향 전환을 위한 시도와 시행착오 / 국가 정보기관장의 평양행: 그곳에는 무슨 좋은 것이 있을까 / 대우 해체의 막전 막후 /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야기 / ‘통신감청 논란’의 뿌리 /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책 속으로

‘학원안정법’ 입법 과정 __
7월 19일, 전두환 대통령이 새삼스럽게 “미국문화원 사건 공판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정부나 당에 마치 강온 양론이 있는 것처럼 비쳐선 안 된다. 방침이 결정되면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앞으로 있을 모종의 조치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학원안정법’이라는 이름의 입법 시안이 내 손에 들어왔다. 학생 약 5000명을 수용해 순화한다는 내용이었다. …… 나는 그 법안 자체가 못마땅했다. 이미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이 있고 어마어마한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계속 법을 만든다고 학원 소요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 이처럼 여당도 납득시키지 못한 법률안을 놓고 안기부가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정부는 8월에 임시국회를 열어 학원안정법안을 상정해 통과시킨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원내총무인 나에게는 아무 사전 협의도 없었다.
7월 30일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온 기자들이 8월 임시국회를 소집하느냐고 집중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시급한 민생 법안을 처리하는 국회라면 소집해야겠지만 학원안정법을 위해서는 아직 소집할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것이 또한 괘씸죄에 해당했다.
그날 마침 미 국무부에 있는 나의 친구 앨런 롬버그가 방한했다고 해서 미국 대사관의 클리블랜드 부대사와 함께 오찬을 했다. 그 자리에서 클리블랜드 부대사가 불쑥 비꼬는 투로 “수용소(gulag) 계획은 잘 되어가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수치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_ 2권 34~36쪽

전두환은 왜 내각제를 염두에 뒀는가 __
전두환은 누구보다 노태우를 잘 알고 있었다. 비록 12ㆍ12의 동지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과연 그가 국가를 맡아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 같다. 나아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가 끝까지 의지를 지켜 자신(전두환)을 보호할 마음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시중에는 “‘노’는 ‘노’인데 ‘노태우’는 아니다”라는 루머가 떠돌며 노신영 국무총리가 후계자가 된다는 풍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전두환의 두터운 신임을 업고 권력을 이어받으려는 장세동 같은 야심가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두환은 한때 내각제 개헌으로 방향을 선회할 의사도 있었다.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바뀌면 노태우의 집권은 사실상 물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야당이 일관되게 ‘직선제 대통령’ 개헌안을 들고 나오면서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전두환의 내각제 개헌론이 야당의 공세를 둔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은 진정으로 내각제 개헌을 할 마음이 있었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 임기가 끝날 무렵이면 간혹 내각제 개헌 문제가 거론되곤 했다. 왜 그랬을까? 내각제가 되면 권력자가 임기가 끝난 뒤 사후 보장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원내각제는 국회가 권력의 중추이기 때문에 대통령제처럼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그런 구조에서는 정치 보복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더라도 자기 계파의 국회의원을 다수 확보하면 사후에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제를 주장하던 사람도 임기 후반에 이르면 내각제를 선호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것 같다. _ 2권 40~41쪽

이미 쓰여 있던 차기 대권 시나리오 __
다음 날 정식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시나리오대로 후보 추천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노태우 대표는 자기가 관련된 사항이므로 불참했고, 임방현 중앙위의장이 사회를 맡았다. 모두 박수로 노태우 대표를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결정했다. 회의는 20분 만에 끝났다. 이어 추천위원 명단에 서명하는 회람이 돌았다.
이때 옆에 앉았던 유학성이 감회 어린 듯 “오늘이 있기까지 6년 11개월이 걸렸습니다”라고 독백처럼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유학성에게 캐물었고, 그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1980년 6월 27일 오전 11시 10분, 내가 중앙정보부장으로 가기로 하는 합의가 이뤄지던 그날 그 시간에 다음번 주자는 ‘노태우’라고 이미 모두 약속이 되었어요. 그런 것이 우여곡절 끝에 오늘에야 실현되었으니 나로서 감회가 깊지 않겠어요?”
유학성은 얼떨결에 비화를 털어놓았다. ‘아, 12ㆍ12 주체들이 모여서 이미 대통령의 순번을 결정해놓았군!’ 나는 그 사실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_ 2권 48~49쪽

출판사 서평

이종찬의 80년, 그 속에서 돌아본 대한민국 80년
역사가 된 시간들에 관한 현장의 기록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후손으로 상하이에서 태어나 한국 정치 1번지 종로ㆍ중구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오랫동안 꿈꾸었던 수평적 정권 교체의 주역이 되어 김대중 정부의 국가정보원장에 이르기까지, 이종찬이 걸어온 80년의 삶과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한국 정치의 민낯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기록했다.
그가 인생의 거친 숲에서 직접 마주한 사건들은 오늘날 한국 정치사를 기록하는 데 하나하나 크고 작은 꼭지를 이루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는 일평생 습관처럼 기록하고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숲의 풍경화를 꼼꼼하게 완성해간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여러 기록에서 생략된 채, 또는 잘못 그려진 채 비어 있던 많은 장면이 그의 손을 통해 이 책에서 생생하게 복원된다.

상하이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한국 정치의 중심부까지
좌절과 절망 위에 도전과 희망으로 그려낸 풍경


“나 자신의 삶 역시 숲 속의 그것이었다. 나를 가리켜 자랑스러운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남보다 먼저 군문에 들어가 힘 가진 사람들 옆에서 혹은 권력기관에서 승승장구해 정치적 기반을 쌓고, 나아가 서울의 정치 중심지에서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성장한 숲에는 그렇게 순탄한 길만 있지 않았다. 민족 해방과 더불어 고국으로 귀환해서 우리 가족이 꾸린 삶은 지극히 가난했고, 분단 이후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가문에 불온의 딱지가 붙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 뒤 군문과 중앙정보부에서, 또 민정당을 비롯한 정치권에서 내가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곡절과 심연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숲은 결코 밖에서 보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숲 속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뜻밖에도 ‘속박되지 않은 삶’이 정말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달리 말하면, 진정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부단한 싸움임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찾고 선택해가는 과정, 그것이 내가 거쳐 간 길이었다. 나는 늘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다.” _ ‘책머리에’ 중에서

이종찬의 80년 삶은 대한민국의 시간과 고스란히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10대 소년 시절 광복과 함께 환국해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는 어려서부터 존경했던 백범의 갑작스러운 죽음, 곧이어 닥친 한국전쟁의 비극,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몰락 등 정국의 극심한 혼란을 직접 목격하는 가운데 인생의 길을 가다듬게 된다. 이때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의 조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길을 따라 참여와 행동으로 나라의 진운에 함께할 방도를 모색하면서 군인의 길을 선택했고, 군에 봉사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정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이종찬은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역사의 격변기에 국가 정보기관에 복무하면서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각종 간첩단 사건과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락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보부의 선거 공작과 7ㆍ4 남북공동성명, 10월유신과 윤필용 사건, 10ㆍ26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이종찬은 나라의 살림살이와 위기관리, 사회 각 분야의 운영과 소통, 대립되는 입장의 조율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고 체득했다. 그 과정에서 철저하게 ‘익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세대를 앞서 그렇게 익명으로 살았던 우당 선생의 정신과 삶이 자신에게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깨닫고 ‘역사의 계승’에 무거운 책무감을 가졌다.
이종찬은 1980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적극 활용해 이 시대와 나라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길에 나섰다. 제11대부터 제14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줄곧 서울 종로ㆍ중구 또는 종로의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민의의 엄중한 요구를 행동의 토대로 삼았다. ‘51% 의회주의자’였던 그는 여당 내에서 누구보다도 국민 앞에 겸허했으며, 국회 운영의 가장 중요한 토대도 야당과의 대화에서 찾았다. 이 시절 그는 자신이 속한 민주정의당을 ‘민족의 정당’,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1990년 무원칙한 3당 합당과 1992년 변칙적 대통령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이종찬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10여 년간 몸담았던 정당을 떠나 한국 정치의 미래와 자신의 행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모색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쓰라린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간 걸어온 길을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돌아보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값진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모색은 귀중한 결실을 낳았다. 이종찬은 역사의 요청에 따라 1995년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했고, 마침내 1998년 ‘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자신이 주장해온 ‘수평적 정권 교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돌아와 이 기관의 개혁에 중요한 토대를 놓았다.
이종찬은 20년에 걸친 자신의 정치 인생에 대해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부끄러움 없는 삶이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긴 스펙트럼의 삶을 마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은 겸손한 자평을 넘어 ‘자유인’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그가 걸어온 경이로운 행로를 만나게 된다. 그 행로는 결코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되 우리 사회 시민의 상식과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며, 이종찬 개인의 꿈을 모두 실현한 것은 아니었으되 한 인간이 의지와 성찰과 결단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감당해야 했던 분투 과정의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종찬의 삶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숲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종찬의 삶을 돌아보는 사적인 기록인 동시에, 그가 큰 기대를 안고 또 때로는 그만큼 큰 좌절을 맞보며 몸소 부딪혀온 대한민국 정치를 낱낱이 고하는 공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조부 이회영이 그러했듯 이종찬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삶을 살고자 진력을 다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의 삶 역시 동시대의 대한민국 역사만큼이나 부침을 거듭했다.
이제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가 그가 살아온 시간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우리의 미래를 가꾸는 데 작은 밑거름으로 쓰인다면, 이 책은 역할을 다한 것이다.

책의 구성과 특징

이 책은 총 2권, 15개 장으로 구성되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다. 1권(1~8장)은 해방 이후 귀국해 육군과 중앙정보부를 거쳐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시기까지를 다룬다. 이어서 2권(9~15장)은 제12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시작해 직선제 개헌과 노태우 정권의 탄생, 3당 합당 이후의 방황, 그리고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내고 김대중 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해 이 기관을 개혁하던 시기까지를 다룬다.
회고록은 한 개인의 기억을 담은 기록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사실관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을 놓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한 개인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에 나아가 생명력을 얻는다. 이 회고록에서 소개된 몇몇 기록들, 예컨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ㆍ이시영에 관한 평가, 유신 선포 및 유신 정권의 경과, 김대중의 대권 도전 과정,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활동, 김대중 정권의 공과 등에 관한 기록만 보더라도, 이종찬이 이 책을 통해 애써 남기고 전하려 한 기억들이 그저 다들 아는 옛날이야기나 자극적인 비화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엮는 과정에서 그는 한국 현대사의 미세한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기억과 주관을 바탕으로 그 흐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나간다. 그럼으로써 더욱더 역동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런 한 개인의 기록이 같은 시간을 훑어낸 역사 기록보다도 오히려 더 생생하고 흥미로운 역사 읽기로 독자를 이끌 수 있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종찬은 이 회고록에서 사건과 현장을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물론 이는 기억에만 의존해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꼼꼼하게 모으고 기록해둔 엄청난 분량의 자료가 있기에 가능했다. 상하이에서 맞은 광복의 날 풍경, 소년의 눈으로 본 김구 암살 이후의 현장, 한국전쟁 당시 모습 등을 기록한 글을 읽다 보면, 그때 그곳의 정경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앙정보부 재직 시절 김형욱ㆍ이후락 부장과 얽힌 일화에서는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마저 느끼게 된다. 조영래가 변호사가 된 과정이라든가 부인 윤장순 여사와 어느 장군 부인의 만남에 얽힌 이야기에서도 특유의 구체적이고 현장감 있는 기술이 빛을 발한다. 이렇게 서술된 이야기들은 독서의 재미를 더하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소중한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후대에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원할 것이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남길 때에도 그런 욕망이 반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너무 노골적이거나 사실관계를 왜곡할 지경에 이르러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회고록에서 이종찬은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구도 미화하지 않고자 한 마디 평가를 위해 먼저 백 마디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며, 그렇게 도달한 평가에서도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솔직히 고백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예컨대 민정당 해체부터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 탈당, 신당 창당과 국민당 합류, 그리고 파탄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고 어떻게 실패했는지에 관한 처절한 자기고백이다. 사실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취사하고 자타를 공정한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자신의 치적을 앞세우는 회고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지은이 자신의 생각이 회고록 전반에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솔직한 자기고백이 있기에 실패를 딛고 내딛은 새로운 발걸음도 더욱더 설득력을 얻는다.
버린 것이 더 많았다는데도 글자 수 77만 자, 200자 원고지 약 4000매에 달하는 기록 속에서 지은이는 지면을 포장과 자랑으로 채워 자기만족을 삼으려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옛날이야기를 재미있게 엮고 군데군데 자극적인 비화로 양념해 눈길을 사로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힌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그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바를 솔직하게 고백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이 책 내용 중 일부는 ≪동아일보≫에 “憧憬 이종찬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2014년 8월부터 2015년 6월까지 41회 연재되어 소개된 바 있습니다.
※ 2015년 9월 17일 15시 프레스센터에서 『숲은 고요하지 않다』 출간기념회가 열렸습니다.

책속으로 추가

6ㆍ29 선언의 드라마 __
노태우는 한동안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지난번 자네가 한 말처럼 대도를 걸을 결심을 하고 있네. 국민이 바라는 것을 필요하다면 수용할 생각이네.” …… 나는 노태우가 지난번과 달리 태도가 상당히 바뀌어 있음을 느꼈다. 나중에 들으니 전두환 대통령은 그때 이미 국면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바로 그 전날 노태우에게 “직선제로 정면 돌파하자”라고 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노태우는 이제 직선제를 받아들여야 할 시점임을 깨닫고 박철언과 이병기에게 은밀하게 시국선언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그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
6월 29일 아침, 당사에 도착했다. 이춘구 사무총장을 비롯해 누구도 이날의 의제에 대해 말이 없었다. 드디어 노태우 대표가 회의장에 나와 마이크를 정리하고 침착하게 6ㆍ29 선언을 읽어 내려갔다. 선언의 원명은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이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사후에 배포된 유인물은 급조한 탓인지 필경체의 복사본이었다. 나는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이 핵심이라고 보고 그곳에 밑줄을 쳤다. 유인물 말미에 “만의 일이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아울러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라는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참으로 감격적이었다. 기자들도 허를 찔렸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송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노태우는 선언 직후 국립묘지에 참배한 데 이어 그 길로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외쳤던 충무공 이순신의 아산 현충사를 찾았다. 여기서 그는 ‘백의종군의 심정’, ‘구국의 정신’, ‘역사와의 대화’ 등 감회 어린 표현으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마치 청와대에서 거부하는 직선제를 자기 의지로 수용하고 이를 역사에 맡기는 것 같은 자세였다. 현충사 참배 뒤 뒤쫓아 간 기자들이 “이 구상을 사전에 전두환 대통령과 상의하지 않았느냐?” 하고 묻자, 그는 “내가 발표문에서 앞으로 건의를 드리겠다고 말했지요?”라고 반문했고, 다시 “언제 대통령을 직접 만날 생각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당에서 당론으로 안 받아들이면 모두 허사지. 그러면 건의고 뭐고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의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_ 2권 57~59쪽

개헌과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__
6ㆍ29 선언 이후 새 헌법안 작성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에게는 여러 가지 주문이 전달되었다. 특히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나를 직접 불러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 기회에 임정의 법통을 잇는다는 내용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합니다. 이 일을 이 의원 말고 누가 하겠소. 현재 민주당안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는데, 민정당안은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어요. ‘정신’과 ‘법통’이라는 두 글자가 대단히 큰 의미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서 틀림없이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으로 반영해주시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다음 날 나는 헌개특위 위원인 허청일 의원에게 먼저 헌법 전문에 관한 각종 자료를 전달하면서 이 같은 입장을 반영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허 의원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 부정적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헌개특위 간사인 현경대 의원을 찾아가 같은 요구를 했다. 그는 이해가 빨랐다. “동감입니다. 저에게 맡겨주시지요.”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하여 1987년 10월 29일 채택된 현행 헌법의 전문은 아주 분명하게 정리되었다. “우리 대한국민은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_ 2권 64~65쪽

이종찬과 3당 합당, 그리고 김대중 __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발표했다. 민정당의 창당 주역이자 원내총무와 사무총장, 정무장관을 역임한 나에게 일언반구 의견을 물은 일이 없었다. 중간평가가 물 건너간 뒤 언론 등을 통해 ‘합당을 통한 정계 개편’이 시도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합당’이라고 하면 고작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 정도를 상상했을 뿐이었다.
나는 합당보다는 유럽식 ‘정책 연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정책 연합’의 우선순위는 김대중의 평민당에 있었다. 내가 정치에 몸담은 5공 시절 이후는 물론이고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나는 그를 ‘용공(容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보기에 그는 민주사회주의자도 아니고 미국 민주당의 ‘리버럴’ 정도였다. 하지만 지역적으로는 호남의 소외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정책 연합의 순서는 평민당부터 협의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 나는 그래서 박철언 정무장관에게도 “이왕 정책 연합을 하려면 지역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정책 연합 시 평민당과의 우선순위를 권유했었다. 하지만 정계 개편은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까지 끌어들여 호남을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3당 합당은 1987년 제13대 대선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지역감정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코너로 몰리자 김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재야 운동권 출신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가 이끄는 야당은 점점 더 보수 야당의 전통에서 멀어졌다.
나에게 3당 합당 사실이 정식으로 통보된 것은 1월 21일이었다.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나자고 해서 삼청동 안가로 갔다. 그는 고등학교 선배였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특별히 나를 설득하라고 시켰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긴말 않고 “여러 가지 심정을 이해하지만 이번만은 노 대통령의 뜻에 따라 달라”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 2월 1일, 민정당은 당 해체를 결의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말 한마디 못 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역사의 증언으로 무엇인가 기록으로 남겼어야 옳았는데 나는 그 전날 노태우 대통령의 당부를 홍성철 실장을 통해 듣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을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내가 그 자리에서 민주당의 김상현이나 노무현처럼 강력하게 항의하지 못한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_ 2권 143~146쪽

청와대의 박태준 비토 __
“저는 원래 자유경선제를 주장했지만 지금의 형세는 민정계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대표 주자로 박태준 최고위원을 밀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이 의원! 박태준 최고위원은 안 됩니다.”
“우리 민정계의 수장인데 왜 안 됩니까?”
노 대통령은 뒷조사를 통해 확보한 박태준 최고위원의 약점을 이야기했다. 나로선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든 아니든 공개되면 박 최고위원에게는 대단히 난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런 정보가 자기 앞에 놓인 문서 봉투에 들었는지 내용은 보여주지 않은 채 그 봉투를 탁탁 쳤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뭔가 박 최고위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가 있음을 직감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 이야기를 입증할 만한 그 이상의 정보나 자료를 나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이대로 김영삼에게 모든 것을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오랫동안 자유경선제를 주장했습니다. 박 최고위원의 출마를 반대하신다면 아무런 준비는 안 됐지만 저라도 나가야겠습니다. 자유경선이니까 누구라도 뜻이 있으면 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김영삼 대표에게 독상을 차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노 대통령이 나의 출마도 반대하리라고 예상했는데 그는 의외로 나를 응시하면서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네”라고 쉽게 답했다.
그런데 청와대 면담 직후 대화 내용이 와전되어 흘러나왔다. 내가 노 대통령에게 박 최고위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전하면서 ‘박 최고위원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청와대였다. 노 대통령의 복잡 미묘한 행태에 내가 또 한 번 걸려든 것이었다. _ 2권 156~157쪽

김종필의 4ㆍ8 밀약 __
김종필은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 청와대를 나왔다. 그는 변신의 명수였다. 즉각 김영삼의 경선 본부가 차려진 하얏트호텔로 갔다. 아마 김영삼은 그때 김종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성질 급한 김영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후보가 되면 운정(雲庭: 김종필의 호)이 당을 맡아주시오. 모든 권한을 일임하겠습니다.”
“당권은 필요 없습니다. 그 대신 몇 가지 다짐합시다. 집권하면 정부를 내각제 정신으로 운영하겠습니까?”
“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과거 야당에서 하듯 모든 것을 급속하게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현존하는 모든 체제는 경제 발전 단계부터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나온 것인데 이를 하루아침에 바꾸면 큰 혼란이 생길 겁니다.”
“운정의 말을 알아듣겠습니다. 3당 합당의 정신이 지금까지 있던 정부를 지키라는 뜻으로 알고 운정의 말을 존중하겠습니다.”
김종필은 그 순간 김영삼이 매사를 너무 쉽게 받아들여 오히려 불안했다. ‘이 사람은 내각제 각서를 쓰고도 오리발을 내밀었는데 약속이 무슨 쓸 데가 있을까?’
“거산(巨山: 김영삼의 호)! 내가 출마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리고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소.”
김종필은 청구동으로 돌아왔다. 이날 김종필과 김영삼의 전격적인 회담을 두고 ‘4ㆍ8 밀약’이라고 부른다. _ 2권 164~165쪽

김옥숙 여사와 아내의 만남: “노심을 파세요” __
경선이 점점 가열되면서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김복동 선배가 다시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 자신도 많은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도 김영삼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 같았다. 김영삼 측은 어떻게 하든지 노태우 대통령의 주변 인척을 포섭해 간접적으로 노심이 자기에게 있음을 과시하는 비겁한 방법을 활용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챈 나의 아내가 5월 11일 광주 집회가 열리는 날, 청와대로 김옥숙 여사를 찾아갔다. 나와는 사전에 전혀 의논하지 않았다. …… 그날 아내는 김 여사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만약 꼭 김영삼 씨를 후계자로 시키고 싶다면 영부인께서 솔직하게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우리는 꼭 대통령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도 제가 이 의원을 졸라서 후퇴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경선이 과열된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중립입니다. 내가 금진호 장관이 김영삼 씨 측 행사에 나가기 때문에 각하가 오해받는다 해서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권했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김윤환 의원이 ‘이미 노심은 결정되었다. 이번 경선은 하나의 축제판으로 끝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김 의원은 누가 보더라도 각하의 측근 아닙니까? 그러니 이 판에 끼어서 우리가 욕먹을 일이 없지 않겠어요? 영부인께서 저에게만 말씀하세요. 그러면 우리는 미련 없이 중단하겠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정말로 나는 중립이에요.”
이 말을 듣고 아내는 너무 앞질러 진심을 말해버렸다.
“사실, 김영삼 씨를 믿지 마세요. 그가 무엇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가 각하의 사후를 보장하겠다 해도 그에게는 오늘까지 지내온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김영삼 씨를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예요.”
김옥숙 여사는 일순 심각해졌다.
“일가들 가운데 김영삼 씨는 믿을 수 있다고 하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어요. …… 김윤환 의원이 그런 것처럼 이 의원도 오늘부터 노심을 파세요. ‘각하의 본심은 나였다’라고 하세요. 그러면 서로 의견이 엇갈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르게 되지 않겠어요?”
“그건 안 됩니다. 저희들이 그런 말을 하면 대부분 웃긴다고 할 거예요. 하여간 더 이상 노심 파는 행동은 자제시켜주세요.” _ 2권 192~194쪽

노태우와 김영삼의 갈등, 그리고 노태우의 민자당 탈당 __
내가 탈당하자 민자당이 흔들리며 복잡해졌다. 그러나 더 이상 김영삼과 정면 대결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 공동체 전체가 오염되고 타락하고 말 것이라는 내 나름의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그 무렵 김영삼 총재 체제의 민자당에서 또 사고가 터졌다. 총선거 후유증의 일환이었다. 8월 31일, 충남 연기군 군수였던 한준수가 지난 14대 총선 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임재길을 도우라는 상부 지시를 받아 자신이 직접 관권선거를 지시하고 행동했다며 그 전모를 폭로했다.
야당은 즉각 총공세에 들어갔다. 공세의 표적은 김영삼 후보였다. 그는 당시 총선거는 자기 책임하에 치른다고 공공연히 말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김영삼은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기자회견에서 관권선거를 시도한 임재길 후보를 구속하라고 역습했다. …… 김영삼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정치 국면 전환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수세로 몰린 여당을 일신하기 위해 총리를 포함한 중립적인 선거 내각으로 개각하라고 요구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했다. 모든 책임을 노 대통령에게 돌리려는 태도였다. 그야말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발언이었다. 당시는 정원식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연형묵 총리와 남북기본합의서 세부 실천 사항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하는 민감한 시점이었는데, 김영삼은 이런 정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선에 나간 총리의 방석을 빼내 골탕을 먹인 격이 되었다.
노태우는 그제야 김영삼이라는 사람의 본심을 알았다. 그와 자신의 사후 보장을 밀약한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알았다. 9월 18일, 김영삼 후보와 사후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동하는 자리에서 노태우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개각을 단행해 중립내각을 구성할 것이며, 이를 위해 자신도 탈당하겠다는 결심을 기습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말에 김영삼은 당황했다. …… 그때 김영삼도 노태우와 갈라서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이때 생긴 감정의 골이 훗날 김영삼 정권에서 노태우를 구속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_ 2권 228~229쪽

DJP 연합 과정에서 드러난 김종필의 이중 플레이 __
그해 9월 김우중 회장이 북한 진출 사업을 위해 평양에 다녀온 뒤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자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이때 권 부장이 “김대중이 집권하면 우리 경제는 완전히 깨지고 만다. 어떤 방법이든 막아야 한다”라면서 김 회장이 자민련 교섭 창구인 김용환과 친하니 단일화를 포기하도록 그를 잘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나 같은 것이었다.
김우중은 당황해 즉시 김용환을 찾아 권 부장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김용환은 이를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김용환에게는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이미 전해인 1996년 말, JP의 지시를 받아 DJ를 따로 은밀히 만나 내각제를 전제로 한 DJP 공조 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 그런데 그 순간에도 JP가 뒤에서 이중 플레이를 하는지는 김용환도 몰랐다. JP는 YS와 따로 내각제에 합의하고자 추진 중이었다. 그러던 중 ≪매일경제≫에 JP의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국가가 편안해지려면 김영삼 대통령이 영단을 내려 중대 결심을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대선을 중지하고 비상사태라도 선포해 내각제 개헌을 하라는 압력이었다. 김용환도 놀랐다. ……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가니 김용환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즉각 당 사무국에 있는 측근 송업교에게 확인했다. 송업교는 JP의 밀명에 따라 서울 시내에 사무실을 차리고 헌법 개정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청와대와 JP가 보낸 인물들과 권영해가 파견한 안기부 요원까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유신헌법을 만든 한태연 교수도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용환만 이런 음모를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 권영해 부장이 김우중 회장을 통해 전한 협박은 결국, “JP와 다 합의된 사항인데 왜 김용환, 네가 초를 치느냐? 이제 그만둬라!” 이런 뜻 아니었겠는가? _ 2권 337~338쪽

대통령 당선 직후 김대중과 클린턴의 통화 __
국립묘지에서 돌아온 김대중 당선자는 국회 야당 총재실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통화했다. 통화하는 동안 사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예상외로 통화가 길어지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축하 전화라면 길어야 10분일 터인데 아무리 통역 시간을 감안해도 너무 긴데….’ 약 40분이 지나 총재실을 나서는 김 당선자의 얼굴이 흙빛이었다. 불쾌함이 역력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일산에 가 있겠소.”
한마디만 남기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통역을 담당한 강경화 씨의 표정을 살폈다. 겨울 날씨임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이런 통역은 처음입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강경화 씨가 속기했던 메모장을 열어 설명해준 통화 내용은 ‘축하’가 아니라 ‘강경한 힐난’이었다. 클린턴은 축하 인사말은 두어 마디뿐이고 직설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당신이 말한 IMF와의 재협상이 많은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루속히 당신이 한 말을 정정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김대중 당선자는 변명도 아니고 항변도 아닌 어중간한 답을 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답변하기에는 이야기가 좀 깁니다.” _ 2권 376~377쪽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새로운 부훈,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탄생 배경 __
개혁의 두 번째 과제는 부훈(部訓) 개정이었다. 안기부는 1961년부터 1998년까지 장기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부훈을 지켜왔다. 이 부훈은 김종필 초대 부장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음지라는 말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는 나에게 “음지란 정보기관의 음산한 배후를 가리키는 것 같아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라고 했다. …… 정보이론의 대가인 셔먼 켄트는 “정보란 지식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부원들의 여론을 조사하고 켄트의 정의를 원용해 “정보는 곧 국력이다”라고 부훈을 정했다. 최종 결재 단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곧’을 빼고 “정보는 국력이다”라고 고쳐 재가했다.
나는 지금도 이것이 아주 잘 된 작품이라 생각한다. 올바른 정보를 많이 가진 나라, 다시 말해 지식을 많이 축적한 나라야말로 부강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강한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 세계 인구의 0.2%밖에 되지 않는 유대 민족이 노벨상의 20%를 휩쓰는 것은 그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하고 활용하는 일에 능하기 때문이다. 활어처럼 생생한 정보를 확보한 나라가 강한 나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정신에 따라 부의 이름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원훈부터 바꾸었다. 원훈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김대중 대통령 때 만든 것이라며 무조건 없앴다. _ 2권 426~427쪽

‘북풍’과 ‘총풍’ __
나는 북풍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마무리하기에도 적당치 않았다. 공작원 같지도 않은 윤흥준을 앞세워 말도 안 되는 북풍 사건을 기획하고 거기에 귀중한 정보 예산을 퍼 넣었던 바보 같은 짓과 절연하려면 아픔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 판단은 이제 사법부에서 가려지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정보기관 본연의 기밀 사항에 손상이 가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밝힐 것은 모두 드러내놓고 사법부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 나의 결심이었다.
총풍 사건은 더욱 한심한 선거 개입 공작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측에서 북측을 방문한 대표단 일행이 만찬 이후 북측 인사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김정일이 이런 말을 했다.
“남측 국정원장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은 ○○○이고, 제일 형편없는 사람은 ×××라고 생각합니다. ×××는 우리한테 선거 때 총 쏴달라고 요청했으니 한심한 사람 아닙니까?”
나는 이 말을 대표단으로부터 전해 듣고 섬뜩했다. 그는 우리 내부의 약점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에 외적에게 공포를 쏘고 연극을 해달라고 한 짓도 알고 있다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이야말로 중대한 이적 행위였다. _ 2권 446~447쪽

김우중 회장에게 친구로서 한 충고 __
김우중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점점 심각해졌다. 나는 참다못해 나의 직분에 맞지 않지만 친구로서 그에게 충고했다.
“세계경영을 하려면 집안 단속부터 해야 하지 않나? 지금 대우는 구조조정과는 역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네. 내실부터 튼실하게 챙기고 자기가 서 있는 기반을 튼튼히 해야 세계경영도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자네에게 상식적으로 말하는 것일세.”
그는 펄쩍 뛰면서 나의 말을 반박했다.
“구조조정을 누가 소홀히 하겠나? 그런데 누가 사 가야지, 내놔도 사갈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싸게 팔면 국가에도 이익이 될 게 없지 않나? 이게 다 IMF 뒤에 숨은 외국자본의 장난이야!”
“우량 기업부터 내놔야지, 적자 기업 내놓고 사라면 누가 사겠는가?”
“나도 자동차 사업에 전념하려는 생각이라 다른 기업들은 처분하고 싶네. 값만 잘 받는다면 당장에라도 처분하겠네.” ……
“김 회장! 나는 자네가 김대중 대통령이 선거를 치르고 정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그런 은혜를 입었다고 김 대통령이 반대급부로 무엇을 해주리라 기대하진 말게. 과거 박정희나 전두환은 대우가 삐걱하면 경제 부처장들 불러서 ‘대우가 망하면 한국 경제가 흔들려. 그러니 봐줘야 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었네. 그러나 김대중도 그런 말 해주리라 기대하지 말게. 그분은 그럴 만한 배포도 없고, 그런 식의 기업 살리기가 잘못되었다고 지금까지 비판해온 사람이네.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자기가 한 말을 뒤집겠나? 김 대통령 입장에서는 김우중도 잘되고 대우도 잘되기를 바라겠지만, 어디까지나 자구 노력을 잘하라는 것이지, 그가 대통령 권한으로 보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안 하는 게 좋을 걸세.”
그 후 김우중의 행동을 보면 내 말을 충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대통령 면담을 위해 노심초사했고, 대통령을 만나면 수출을 위해 금융을 풀어야 한다는 요청을 되풀이했다. 실로 3공, 5공 방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대우라는 거대 기업군은 그의 원맨쇼에 달려 있었다. _ 2권 484~485쪽

국가정보원 불법 감청 __
미국의 백악관이나 의회는 모두 통신정보(SIG-INT)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라고 사생활 침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문제를 우리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따지고 검토하는 것이 미국의 풍토다. 그러나 그들은 ‘사생활 보호’와 ‘국가 안전보장’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에 대해서도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보 상황이 긴박할 때는 사생활이 어느 정도 침해되더라도 이를 희생해 안보를 지키고자 노력했고, 또 인권이 지나치게 침해되면 안보 상황과 균형을 맞추고자 의회가 견제해왔다.
하지만 우리 국회는 어떠한가? 현재 이동통신에 대한 감청이 공백 상태인 줄 알면서도 이를 개선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 작업을 부지하세월로 미루고 있다. 2015년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해킹 문제도 사실 국회가 합법 감청을 허용하는 입법을 해줌으로써 불법 논란을 정리해야 할 문제다. 즉, 국회가 통신기술의 발전 추세에 맞추어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해 합법적인 감청을 허용해주고, 그런 연후에 불법 감청에 대해 철퇴를 가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불비한 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정보기관은 법이 개정될 때까지 놀고먹든가, 아니면 부득이 불법이라도 감행해 국가 안보를 지키려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국회에서 이렇게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국회의 무능 이전에 국정원 자체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국민이 국정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_ 2권 531~532쪽

왜 국정원장을 그만두었나 __
내가 그만둘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게 된 셋째 계기는 김대중 대통령이 원하는 국정원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회의가 든 데 있었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나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걸핏하면 “국민이 중앙정보부를 무서워해야 한다”라고 요구하는 데 저항감을 가졌었다. 이 말이 결국 모든 정치 사건의 주범이었다. ‘남산’에서 왔다고 하면 울던 애도 울음을 그치고 산천초목이 떤다고 하지 않았나? 정치인도 ‘남산’이라면 오금을 펴지 못했고, 기업인, 은행장, 공무원 모두가 무서워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무섭기는 무서웠다. 1971년 10ㆍ2 항명파동 때 여당의 중진들이 짹소리도 못 하고 줄줄이 끌려와 고문당하고, 수염 뽑히고, 의원직 사퇴서를 썼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난 것도 박종규 경호실장이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도대체 정보부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김대중이 동경에서 반한 활동을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한마디 하자 이후락이 ‘각하의 방침’이라고 생각해 무리한 줄 알면서도 백주에 도쿄에서 납치 사건을 강행했던 것이다. ……
1999년 4월 16일, 청와대에 가서 김 대통령에게 주례보고를 했다. 보고에는 총풍 사건과 관련된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김 대통령은 몹시 불쾌하다는 반응이었다. “이게 언제 일어난 사건인데 아직 1심 재판도 끝나지 않고 질질 끌고 가는 거요?”라고 힐문했다. 그리고 이어 “요새 국정원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래요”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이 말에 질겁했다. ‘아! 이건 김대중 대통령이 할 말이 아닌데!’ 그 순간 나는 이제 이 직책에서 떠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 뒤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까지의 국정원 개혁 방향은 분명히 ‘안으로는 국민에게 사랑받고 밖으로는 가상 적이나 다른 나라에 물샐틈없는 정보활동으로 무서우면서도 존경받는 기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폭압 기관이 아니라 외경받는 기관이 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김 대통령이 ‘국정원을 무서워하는…’ 운운한 것을 보면 혹시 예전과 같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혹시 그간 나의 활동에 대해 너무 정치적이라는 오해가 쌓인 결과인가? _ 2권 550~552쪽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__
오는 2019년은 3ㆍ1 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앞서 언급한 우당 이회영의 생각과 삶은 독립운동의 자장 속에 있었고, 그 독립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바로 3ㆍ1 혁명과 임시정부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2019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요즘 심사숙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왕조(王朝)의 백성이 민국(民國)의 국민으로 스스로 탈바꿈한 이 혁명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 이후 100년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지를 곰곰이 되새겨보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1945년 이후 70년의 역사가 아니라 ‘임시정부 수립’ 이후 100년의 궤적 속에서 돌이켜보는 일이다.
이 100년의 역사를 과연 무엇으로 기록하고 기념할 것이며, 나아가 거기서 무슨 비전을 찾아낼 것인가? 내가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그 100년의 이야기들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용해해 담아내려는 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다. _ 2권 561~562쪽

기본정보

상품정보
ISBN 9788946060517
발행(출시)일자 2015년 09월 14일
쪽수 568쪽
크기
153 * 224 * 35 mm / 802 g
총권수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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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득공제 안내

  • 도서 소득공제란?

    • 2018년 7월 1일 부터 근로소득자가 신용카드 등으로 도서구입 및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 추가 공제됩니다. (추가 공제한도 100만원까지 인정)
      • 총 급여 7,000만 원 이하 근로소득자 중 신용카드, 직불카드 등 사용액이 총급여의 25%가 넘는 사람에게 적용
      • 현재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의 소득 공제한도는 300만 원이고 신용카드사용액의 공제율은 15%이지만, 도서·공연 사용분은 추가로 100만 원의 소득 공제한도가 인정되고 공제율은 30%로 적용
      • 시행시기 이후 도서·공연 사용액에 대해서는 “2018년 귀속 근로소득 연말 정산”시기(19.1.15~)에 국세청 홈택스 연말정산간소화 서비스 제공
  • 도서 소득공제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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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고요하지 않다 2
이종찬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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