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요약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국가적 혼란을 경험한 러시아는 푸틴 정권의 성공적 집권, 고유가 시대의 지속 등 내외적 계기에 힘입어 21세기 자본주의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가 러시아에 새로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러시아는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역사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20세기 초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새로 시작되었다면, 20세기 말 자본주의는 러시아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근대적 유토피아 건설의 장엄한 기획, 그만큼 극적인 추락을 일상으로 경험해낸 러시아에서, 현재 전 세계가 공유하는 후기산업사회의 탈근대적 비전은 서구와 다른 가치적 맥락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러시아에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러시아 사회를 읽고 해석하는 독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이 책은 글로벌 시대 보편적 문화 현상으로 대두한 대중문화의 시각에서, 소련 붕괴 이후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와 그 이전을, 또는 포스트소비에트와 그 외부를, 시공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가치의 차원에서 가르고 관통하는 어떤 특성을 고찰해보고자 했다. 대중문화는 다른 어떤 문화 영역보다 정치·경제·이념적 질서를 포괄하는 총체적 사회 패러다임에 크게 좌우되며, 이를 빠르게 순환·소비시킨다. 동시에 그것은 당대 대중의 일상의 희로애락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따라서 대중문화를 통해 사회를 조망하는 것은 가장 최근의 러시아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모든 학술적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 즉 러시아 사회의 당대성에 대한 이해를 현실화하고 최대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 책은 가장 최근의 러시아 대중문화 현상을 총체적 사회·문화 패러다임의 변화와 관련 지워 분석했다.

기획 의도 및 출간 의의

러시아와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이후 상당한 수의 러시아 관련 서적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그 주된 대상은 정치, 경제, 사회, 또는 고급예술문화였다. 러시아 대중문화, 특히 체제 전환 이후 자본주의 러시아 대중문화에 관한 책은 아직까지 국내에 출간된 사례가 없다. 그것은 인터넷 관련 정보 사이트나 러시아 관련 개설서에 산발적, 또는 부분적으로 소개된 정도에 불과하다. 이 책은 러시아 대중문화라는 하나의 주제에 온전히 바쳐진, 러시아 전문가에 의한, 최초의 단독 저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은 그간 국내 러시아 문화연구의 주된 경향이었던 특정 작품이나 작가, 개별 현상에 대한 미시적 분석 대신 대중문화 현상을 사회구조 전반, 총체적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거시적 틀과 관련 지워 분석하는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중문학 연구에서는 출판 구조와 소비 시스템의 변화를 체제 전환의 사회적 맥락에서, 러시아 현대 영화와 관련해서는 그 대표 장르의 문화적 코드를 영화의 산업적 구조 변화, 더 나아가서는 이를 야기한 사회구조 변화와 밀접히 관련 지워 해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출판 산업 관련 통계와 독서문화 관련 실태 조사, 영화 제작 편 수, 박스오피스, 극장 네트워크 변화 등을 포함한 러시아 영화 시장의 산업적 지수, TV 제작 구조의 변화와 관련법 개정 등 각종 통계 자료와 설문 조사, 인터뷰 등 양적·질적 사회 조사 결과가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사회학’이라 일컬을 수 있는 이 방법론은 대중문화를 통해 현대 러시아 사회의 특성을 읽어내고, 대중문화가 소비하는 이념 속에서 새로운 러시아 국가 정체성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마디로 이 책은 현대 러시아 대중문화에 대해 아직 국내에 소개된 바 없는 가장 최신의 자료와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동시에, 그 의미를 러시아 사회 변동의 거시적 맥락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해석해내었다. 책 사이사이 포진한 진귀하고 재미있는 사진들이나 그림 또한 흥미로운 감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는 영화, 대중문학, TV와 같은 친숙한 이름으로 러시아라는 낯선 대상에 흥미롭게 다가가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한편 문화 또는 대중문화 연구 관련 종사자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사례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최초의 러시아 대중문화 연구 서적이라는 점에서 관련 학과의 교재나 연구자들을 위한 참고서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내용 소개
위와 같은 문제의식과 기획 의도에 따라 이 책은 가장 최근의 러시아 대중문화 영역에서 목도되는 다양한 현상과 그 의미를 소련부터 현재 자본주의 러시아까지 사회문화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거시적 틀 속에서 고찰했다.

제1부는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에 고유한 가치적·이념적 구조를 결정하는 이론적·역사적 요소를 검토해보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제1부 제1장에서는 서구와 성격을 달리하는 러시아 대중문화 연구 동향에 관해 간략히 살펴본다. 제2장에서는 스탈린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러시아 대중문화의 역사를 ‘단일문화 패러다임-이중문화 패러다임-다문화 패러다임’과 같은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세 시기로 분류해 이 패러다임의 특징을 집중적으로 반영하는 장르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세 시기란 ① 국가 주도의 단일 문화 시스템이 형성·정착된 스탈린 시기(1930～1950년대 중반), ② 공식적 대중문화와 대안적 대중문화가 경쟁하는 이원적 구도가 발생한 해빙기 이후 시기(1950년대 중반～1980년대), ③ 사회주의 이전, 또는 사회주의 시기 대중문화의 경험과 새로이 수입된 자본주의적 대중문화가 문화적 다원주의의 구도 속에 흡수·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는 포스트소비에트 시기(1990년대 이후)를 말한다.

이러한 작업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제2부, 즉 1990년대 이후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대중문화 고찰을 위한 사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러시아는 뚜렷이 구별된다. 1990년대가 과거와의 과격한 단절, 자본주의 논리로의 과포화를 본질로 한다면, 2000년대는 소련을 포함하는 과거 및 전통적 가치와의 화해, 이를 통한 문화적 다원화의 경향을 보인다. 제2부에서는 현재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이러한 특성을 대중문학, 영화, TV, 섹슈얼리티를 키워드로 삼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사회 변화의 본질을 한편으로는 대중문화의 산업적 특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소설, 블록버스터, TV 드라마와 같은 구체적인 문화 형식의 미적 본성과 결부 지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섹슈얼리티는 앞서 거론된 모든 대중문화 영역에 공히 나타나는 지극히 포스트소비에트적인 문화 현상이자 그 자체로 특별한 독법을 요구하는 문화적 실제로서 1920년대 자료부터 저자가 직접 실시한 가장 최근의 설문조사 등이 활용되면서 다채롭게 해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