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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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만큼 성배순 시인은 시에서도 무한하게 확장 가능한, 열린 이야기 구조를 펼쳐간다. 우주의 생성 과정에서 신과 인간이 한데 어울려 벌이는 복잡하고 아주 치졸한 감정 다툼을 다루는 신화에서부터 우수마발(牛?馬勃)의 하찮은 것들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이야기들이 그에겐 아주 친근한 삶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 신화나 노자와 장자의 걸림 없는 무애자재(无涯自在)의 삶 그리고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나 여우놀이 등 동서고금의 설화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그에게 설화적 세계는 산업화 이전의 불편한 원시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대의 원시사회에서 벗어나 지금의 눈부신 산업사회를 가능하게 한 진보와 문명에 의문을 품으며, 강인하고 준엄한 인간의 생명력을 회복할 것을 시로써 희원한다.
작가정보
작가의 말
비 오는 날, 스멀스멀 송신증이 이는 날
검은 청빛 낯빛 고운 여우를 따라
집을 나선다. 건물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도시를 빠져나간다.
뿌리를 보이며 춤을 추는
나무들이 만드는 시간의 숲을 지나
동굴 속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찾아 동굴을 나서고
바위산을 넘어, 뿌연 강을 건너
동굴과 멀어진다. 빌딩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도시 한가운데
여자는 서 있다. 흠뻑 젖어
빙글빙글 서 있다. 검은 청빛 낯빛 고운 여우
응애응애 꼬리를 나풀대고 있는데…….
2019년 겨울 언저리
세상의 마루에서
성배순
목차
- 제1부
꽃을 보면 배가 고프다
꽃무룻
암컷론 2
산불
시인과 농부 1
고무신 한 짝
조치원 엘레지
나무꾼의 선녀를 내려놓으리
배고픈 귀
터키블루, 나의 글루밍 선데이
우리 엄니 시집을 가시네
신 여인국 2
천사의 눈
세종갤러리 카페에서
안녕, 별다방 아가씨
제2부
진눈깨비
포란반
달맞이꽃
선샤인
사랑니
개와 늑대의 시간
나는 펫
시인과 농부 2
우리는 순한 짐승이 되어
어떤 스투키
근황
유년일기
오후 세 시의 순대국밥집
제3부
절 앞에서 고기를 굽다
박태기
도꼬마리
신풍
여름 지나 가을
갱년기
쑥 타령
시인이면 좋겠소
예산 시인 김 아무개
토르스 산맥을 넘으며
밀술이 익는 계절
성소피아 사원 풍경
고운뜰공원에서
세종호수공원
제4부
선녀의 나무꾼처럼
신데렐라의 연인
비 오는 날 여우야 뭐 하니
일몰, 그리고 일출
메두사를 위하여
아침 풍경은 영원의 한순간
나는 펫 2
쉰, 어느 날
바람꽃
스토커, 딸
한때 나는 야훼의 딸이었지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세상의 마루에서
해설 김영호
시인의 말
추천사
-
성배순 시인의 시는 깊다. 시의 깊이는 사유의 깊이에서 온다. 깊은 사유는 선입관을 갖지 않을 때 태어난다. 선입관은 일종의 편견이다. 편견을 갖지 않으려면 사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 사유의 깊이는 사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형성된다. 이는 성배순 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통해 사유의 깊이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의 시에서 화자인 시인은 여행 중에 있거나 생활 중에 있을 때가 많다. 여행 중에 있을 때는 현지의 체험에서 얻는 성찰이나 반성, 깨달음이 시가 되고, 생활 중에 있을 때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얻는 진리나 지혜, 정안(定安)이 시가 된다. 그의 시는 대상과 관계에서 깊이 있는 진리와 지혜, 정안을 발견하는 과정에 창작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를 깊은 시로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재치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그의 시가 독자들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기 바란다.
-
성배순 시인의 시집 『세상의 마루에서』는 인생의 신산(辛酸)을 드러낸 리얼리즘 시편들과 시인이 발 딛고 선 자리를 신화적 시각으로 확장해서 쓴 시편들로 나뉜다. 나에게는 유미주의 시각이 들어간 후자의 시편들 「세상의 마루에서」, 「진눈깨비」, 「나는 펫」, 「터키블루, 나의 글루밍 선데이」 등이 더 다가왔다. 성 시인이 어느 방향으로 시의 정체성을 확립할지가 흥미로운 일. 공자의 말씀처럼 방향을 정하면 느리더라도 멈추지 말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중요하다.
출판사 서평
성배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상서로운 동방의 동물인 청여우에 대한 기다림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청구산(靑丘山)의 양지바른 남쪽 언덕에는 옥돌이 많이 널려 있고, 음지인 북쪽 언덕에는 청확(靑?)이라는 질 좋은 푸른 염료가 나며, 이 산에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처럼 생긴 짐승이 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삼키면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구슬을 지니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여우는, 천하가 태평해지는 상서로운 조짐을 알려주는 상상 속 동물이다. 이는 곧 우리 몸속에 잠들어 있는 웅혼한 기상과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원숙한 지혜를 상징하는 우리 민족의 원형(原型,)이라 할 수 있다. 성배순 시인은 작품 속에서 이런 강인한 생명력과 지혜를 끊임없이 갈구하며, 갖은 삶의 비애와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개와 용기를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 찾고자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털 없는 원숭이에게
부싯돌 속의 불 왜 몰래 주었을까
그것이 오랜 의문이라는 듯.
사슴을 쫓던 그때 동굴 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던
달큰한 익힌 고기 냄새만 아니었더라도
쓰레기 더미 옆을 지나다가
뼈다귀에 붙은 고기 조각 핥지만 않았더라도
사람들의 우리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듯.
어둑어둑 저녁이 물드는 지금
인간의 친구로 있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근질거리는 송곳니로
이 쇠창살 끊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골똘히 생각하는 유기견의 우리 속
저 개 같은 것 보고 있자니
갑자기 겨드랑이가 근질거리는 듯.
-「개와 늑대의 시간」 전문
인디언들은 독화살을 맞았을 때 칡을 달여 먹는다더군.
집을 팔고 임대아파트로 이사하는 날 남편이 한 말이다.
그날은 가까운 사람에게 물을 먹은 날이기도 하다.
이곳 갈뫼로 351번지 칡산에서 멈춘 것은, 순전히 남편의 그 한마디 말 때문이다.
그렇게 물을 먹고도 소갈증에 걸린 나는 수시로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먹은 물들이 몸속에서 웅덩이를 만들고 썩어 냄새를 풍긴다.
수독이네요. 몸이 붓고 가려워 병원에 간 날 의사는 몸속 물이 걸쭉하게 뭉쳐져 담이 되었다며 내게 물을 먹인다.
가까이 오지 마, 손톱을 세우고 온몸을 긁으면 손톱 밑마다 피가 고인다.
카르마의 등가교환 법칙이 맞는다면 이제 내게 사랑이 오겠군, 돈이…….
아니지, 언젠가 진 빚을 이제야 갚은 거겠지, 비로소 인연이 정리된 거겠지.
붉은 자줏빛 칡산에서 신발을 벗는다. 아내의 주검 앞에서 노래를 부른 장자의 달관을 흉내 내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전문
‘여성’이란 표현은 어딘지 싱싱한 생명력이 제거된 건조하고 엘리트주의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암컷’이라는 말은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생명력을 싱싱하게 전달하며, 인간과 동물을 통틀어 암컷 생명체가 가진 근원적인 생명력을 포괄한다.
거무튀튀한 등에
찰싹 달라붙은
하얀 새끼 알.
어부바하다가
등의 살 속으로
품어 버렸네.
물갈퀴 손 펼쳐
펑펑, 생살 찢고,
너덜너덜 등짝
폴짝폴짝 넘어가는
열 마리, 백 마리
피파개구리 새끼들.
-「암컷론 2」 전문
우리 자신이 우주와 자연의 일부로 다른 동물과 연결돼 있다는 시인의 인식은 암컷에 대한 뜨거운 공감을 통해 뭇 생명에 대한 포용력과 일체감으로 확산된다. 이는 곧 교감함으로써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것들이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만유동근(萬有同根)’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이 서로 신비로운 힘으로 연결되어 하나가 될 때 우리 인생의 봄도 절정에 달한다. 성배순 시인은 그러한 삶의 경이로움을 이번 시집에 담아냈다.
기본정보
ISBN | 9788939230439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11월 20일 | ||
쪽수 | 130쪽 | ||
크기 |
124 * 207
* 13
mm
/ 156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실천문학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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