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프는 말없이 그(구조 장교)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전에 모래사장을 뒤덮고 있던 신비로운 마력의 모습이 잽싸기 눈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제 섬은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져 버렸다.-사이먼은 죽고-잭은……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매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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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는 말없이 그(구조 장교)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전에 모래사장을 뒤덮고 있던 신비로운 마력의 모습이 잽싸기 눈을 스쳐갔다. 그러나 이제 섬은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져 버렸다.-사이먼은 죽고-잭은……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매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소년들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인 장교는 감동되어 약간 난처해했다. 그는 그들이 기운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외면을 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뜻한 한 척의 순양함에 눈길을 보내며 그는 기다렸다.]-302~303쪽
성악설을 구체적으로 그린 [파리대왕].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정치행위로 [파리대왕]. 소년들은 충실한 도구일 뿐. 그러나 구조대장에게 구조된 이후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천진난만함으로 돌아갔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소설에서는 원래 아이다움으로 돌아갔다고 했지만...
인간 군상의 모습을 잘 다룬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입니다. 민음사 번역으로 처음에 읽었을 때는 이해를 잘 못했지만, 여러 번 읽고나서야 가까스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게 노벨문학상 수상작일까? 그정도로 가치가 있나’라는 생각을 한 이유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해설집을 보고나니 충분히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읽으면서 갸우뚱거렸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네이버를 검색해 본 결과 번역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런 걸 보면 역자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파리대왕]이란 용어는 중후반에 아주 잠깐 거론됐습니다. 사이먼의 죽음과 연결지어서 말이지요. 사이먼에게 “너는 참 바보다”라고 말한 부분부터 파리대왕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넌 여길 벗어나서 딴 아이들과 노는 게 좋아. 그들은 너의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랠프가 네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길 바라지는 않겠지? 너는 랠프를 퍽 좋아하지? 그리고 돼지와 잭도?”라는 부분과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그리고 “우리는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을 거야. 알겠어? 잭도 로저도 모리스도 로버트도 빌도 돼지도 랠프도. 너희들 모두. 알겠어?”란 대사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조난을 당한 이후 누더기 옷이 된 일행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랠프와 돼지. 둘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요. 어른들이 없다는 걸 안 이들은 조난당한 소년들이 더 있을거란 생각을 하고 불러모으기 위해 소라를 활용합니다. 랠프가 소라를 수어 번 분 이후에야 하나 둘 씩 등장합니다. 각각 로저, 사이먼, 로버트, 헤럴드, 빌, 잭이란 소년들의 정치극이 이 소설의 주제이지요. 적자생존도 해당됩니다.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회의를 하며 체계를 갖춰갑니다. 소라가 권력의 상징이고, 그 상징 아래 여러 규칙들이 만들어 가는 시기에 잭이 체제에 제동을 걸며 랠프와 갈등이 생성되고 결국 체제는 붕괴되는 그런 정치극이 [파리대왕]이 중반내용입니다. 사이먼과 돼지가 살해를 당하고 잭을 비롯한 오랑케 일행과 랠프와 격렬한 싸움을 벌인 이후 랠프가 구조되며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비교적 작은 소년들은 이제 <꼬마들>이라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랠프를 선두로 해서 키의 크기는 차례 차례 순서가 있었다. 사이먼과 로버트와 모리스 등 세 소년이 속해 있는 부분은 모호했지만, 키가 큰 축과 꼬마들을 분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꼬마들인 여섯 살쯤 된 축들은 뚜렷하게 독립된, 그러면서도 동시에 충실한, 자기들만의 생활을 보냈다. 그들은 거의 진종일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과일을 따가지고는 먹기만 하였다. 잘 익었나 덜 익었나, 맛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은 가리지를 않았다. 이제는 배앓이나 일종의 만성 설사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어두워지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였고 서로 의지하려고 떼지어 있었다. 먹는 것과 잠자는 것 외에는 노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목적도 없이 하찮은 놀이를 눈부신 바닷가의 휜 모래에서 벌이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그리며 우는 것은 예상외로 드물었다. 햇˳에 타서 까맣게 된 몸은 아주 더러웠다. 꼬마들은 소라의 소리에는 순종하였다. 랠프가 소라를 붙었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 랠프는 키가 컸고 따라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와 유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꼬마들이 화합의 재미를 즐겼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 일을 빼놓고선 꼬마들은 큰 소년들과 어울리는 법이 거의 없었다. 꼬마들은 그들 나름의 극히 감정적인 단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85쪽
[파리대왕]은 조난당한 와중에도 서열을 통한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소라를 가지고 있는 랠프가 서열 1위라고 볼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잭이 1위일 수 있습니다. 사냥을 통해서 말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이전의 생활의 터부가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웅크리고 앉은 어린이의 주위에는 부모와 학교와 경찰관과 법률의 보호가 있었다. 팔매질하는 로저의 팔은 로저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제는 파멸한 문명 세계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었던 것이다.]-89쪽
저는 성악설을 지지하는 쪽입니다. 인간은 절대 선하지 않습니다. 본성은 매우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가 그나마 있기 때문에 본성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무인도같은 말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처음에는 익숙한 제도에 맞춰갑니다. 규칙을 만들고, 조난에서 구조되기 위해 협력도 할 겁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갈등이 생기면 와르르 무너지기가 쉬움을 [파리대왕]의 세계에서는 말했습니다. 작품에서는 잭과 랠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권력욕이 강하냐는 잘 고발했다고 생각합니다. 판을 깨기 시작한 잭이 그랬습니다. 랠프는 소라라는 도구로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했지요. 반면, 잭은 그런 랠프에 대항하는 상대입니다. 그는 랠프의 소라에 무조건 따르는 편이 아닙니다. 사냥이란 수단으로 소라에 대항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인간 무리가 이뤄지면 가장 먼저 행해지는 건 역시 정치이지요. 정치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히 갈등입니다. 잭과 랠프는 권력이 있는 인물과 그 권력에 대항하는 인물, 돼지는 무시당하면서도 의외로 지혜로운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로저라는 새침한 소년은 내성적인 인물이지요. [파리대왕]에서는 무인도에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그 시작은 누가 리더로 선정되느냐였지요. 잭은 성가대 리더였기 때문에 자신이 돼야 한다고 말했고, 랠프는 소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작품을 내내 읽으면 나오지만 소라가 그 권력의 상징입니다. 리더 선정의 과정은 투표로 결정됐습니다.
[이 선거 장난은 소라만큼이나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잭은 항의를 하기 시작했으나 좌중의 고함소리는 대장을 골라내자는 일치된 의견에서 박수갈채로 랠프를 선출하자는 것으로 변했다. 그 의견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것은 돼지였고, 한편 누가 보아도 지도자다운 소년은 잭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랠프에게는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조용함이 있었다. 몸집이 크고 매력 있는 풍채였다. 뿐만 아니라 은연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을 소라였다. 그것을 불고 그 정교한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강암 고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그런 존재는 별난 존재였던 것이다.]-30쪽
이런 지문 아래 대사를 보면 굉장히 정치적입니다.
[“소라를 가진 애가 좋아”
“랠프! 랠프!”
:나팔 같은 것을 가진 애를 대장으로 삼자“
랠프는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고 했다.
“자, 그럼 잭이 대장이 되길 바라는 사람은?”
따분한 듯 순종하면서 성가대원들이 손을 들었다.
“내가 되길 바라는 사람은?”
성가대원 이외엔 돼지만 빼고 모두 단박에 손을 들었다. 그러자 돼지도 마지못해 손을 위로 들었다.
랠프는 세어 보았다.
“그럼 내가 대장이다.”
소년의 일단이 박수를 쳤다. 성가대원들도 박수를 쳤다. 분해서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잭 얼굴의 주근깨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박수소리가 울리는 동안 그는 벌떡 일어섰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주저앉았다. 랠프는 무엇인가를 제공해야겠다 생각을 하면서 잭을 건너다보았다.
“물론 성가대는 네 소속이야”
“성가대는 군대를 삼을 수가……”
“그들은…… ]-31쪽
민주정치가 조난당한 와중에도 행핼 수 있었던 이유는 민주주의에 학습된 랠프와 몇몇 소년들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잭의 방해공작으로 랠프 체제는 쉽게 흔들렸지요. 소라라는 수단은 있지만 잭에겐 별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잭도 소라를 만지작만지작거렸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랠프와의 대결 과정에서 소라와 돼지는 모두 파괴를 당합니다. 물론 사이먼도 그 전에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 원인은 추악한 인간 본성에 있음을 작품을 읽으며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103쪽
잭과 랠프의 세상을 압축한 세계. 사냥을 좋아하는 잭. 오두막을 짓고자 하는 랠프. 역자는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까지 거론했습니다. 잭은 어둠의 인물이라 했고, 랠프는 리더십이 뛰어났다고 표현했지요. [데미안]에도 두 개의 세계가 소개됐지요. ‘사랑이 넘치는 세계‘와 ‘범죄가 많은 세계‘ 위 글귀를 보니 문득 데미안이 생각났습니다. [파리대왕]의 세계는 잭과 랠프의 세계라는 걸 작품을 읽어가며 알 수 있었습니다. 잭은 사냥을 좋아했고, 돼지는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랠프의 관점에 따르면 지혜와 지식이 넘쳐흐른다고 했지요. 랠프는 리더의 자리에 있으면서 관찰력이 그만큼 높아진겁니다. 경험이란 게 이런거구나라는 걸 추론해 볼 수 있었던 랠프였습니다.
[랠프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한 가닥의 굳건한 모래사장을 골라잡고 걸어갔다. 발길을 지켜보지 않고서도 걸어갈 수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가를 걸어가다가 홀연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는 놀랐다. 이승의 따분함을 깨우친 것 같았다. 이승에서의 모든 도정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정해진 것이며, 세상살이의 태반은 발걸음을 조심하는데 보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번 모임은 장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무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촉박하다는 것, 기울려는 석양, 걸음을 빨리 했기 때문에 얼굴에 부딪는 가벼운 바람기가 한꺼번에 의식되었다. 이 바람에 회색 셔츠를 그의 가슴에 밀어붙였다. 때문에 그는 셔츠의 주름이 마분지처럼 뻣뻣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처음으로 깨달았다. 반바지의 닮아빠진 끝이 마구 비벼지는 바람에 넓적다리의 앞쪽이 벌겋게 되고 조금 쓰라리는 것도 알았다. 온통 더럽고 누더기가 된 것을 발견하고 그는 마음의 경련이 일었다. 눈을 가리는 더벅머리를 연방 쓸어넘이는 것도, 또 해가 지고 난 뒤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잎사귀 속에 몸을 뉘이는 것도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그는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하였다.]-110~111쪽
보통 이런 행위는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에서 산책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을 때의 그 모습. 회의에 대한 진지한 자세도 주선해야 할 입장이니 앞선 잭의 농락에는 웃었지만 자신에 화가 났던 랠프는 더 진지해지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랠프의 행동은 정치가를 빼닮았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잭과 돼지의 특성을 파악한 랠프의 행동에 눈이 들어온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리더로서 동지들의 특성에 대해 파악한 것인데 돼지는 뚱뚱하고, 병이 있지만 지혜롭고 지식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상황판단도 나름 좋았고 말입니다. 잭은 헌터 기질이 뛰어났습니다. 이런 주요인물의 특징도 생각하며 걸어가는 것. 리더의 자질은 충분한 랠프였지만 결국 잭에게 된통 당했지요. 랠프는 정치의 본질을 놓친 것 같습니다. 권력욕. [파리대왕]에서 쓰인 소재는 집단, 정치, 살해, 불, 무인도입니다.
-적고 싶은 글귀.
[랠프의 바로 앞에서 걸어가던 사이먼에게 아무래도 곧이 안들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할퀴는 발톱이 있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으며, 발자국을 남기지도 않고, 게다가 동작이 무디어서 쌍둥이 형제를 따라잡지 못한 짐승이라고? 짐승 생각을 아무리 해보아도 사이먼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영웅적이면서 동시에 병든 인간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딴 소년들은 집회석상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얘기를 할 수가 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여럿 앞옆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치 한 사람에게 얘기하듯,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발짝 비켜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창을 어깨에 메고 랠프가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수줍은 듯 사이먼은 걸음을 늦추어서 랠프와 나란히 걸어갔다. 그리고 눈까지 내려오는 함부로 자란 검은 마리카락 사이로 그를 쳐다보았다. 랠프는 사이먼 쪽을 흘끗 쳐다보고 전에 사이먼이 바보짓을 했다는 것은 다 잊어버렸다는 듯이 억지로 미소짓더니 다시 멍하니 눈길을 돌렸다. 한순간 자기 마음을 그가 알아주었다는 것으로 사이먼인 마음이 기뻤으나 자기 자신에 이것저것 생각하기를 그쳤다. 그가 나무에 부딪치자 랠프는 성마른 듯 곁눈질을 하고 로버트는 킬킬거렸다. 사이먼은 비틀거렸다. 이마에 휜 점이 생기더니 빨갛게 되어 가지고 방울이 떨어졌다. 랠프는 사이먼 생각을 팽개치고 지옥처럼 괴로운 자기세계로 돌아갔다. 언젠가는 성채에 당도하리라. 그때 대장은 천천히 가야 하리라.]-153쪽
[가장 위대한 생각이란 가장 단순한 법이다. 할 일이 생기니 모두 열을 내어 일하였다. 적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돼지는 기쁨과 넘치는 해방감으로 가득 찼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기여했다는 자랑스러움으로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그 때문에 그는 뗄감을 나르는 데 조력하였다. 그가 나른 나무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모임 때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는 화강암 고대에 쓰러져 있는 나무였다. 그러나 딴 소년들에겐 화강암 고대가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아무리 쓸모없는 것이라도 거기 있는 것은 다치지를 않았다. 쌍둥이 형제는 가까이 피워놓은 불이 밤에는 위안거리가 됨을 깨달았다. 이걸 알고 몇몇 꼬마들은 춤을 추고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194쪽
[자기들 <대왕>에게 새까맣게 달라붙고 도려낸 창자를 번쩍이는 석탄더미처럼 만들고 있는 파리 떼 이외에는 모든 것이 기력을 잃고 있었다. 코의 혈관이 터져 사이먼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파리떼는 멧돼지의 풍미에 혹해서 사이먼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피를 흘리자 사이먼은 발작도 멎고 나른한 잠에 빠져 버렸다. 저녁때가 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동안 그는 거적같은 덩굴 속에 누워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잠이 깨었다. 바로 얼굴 밑으로 검은 흙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꼼짝 않고 그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얼굴을 비스듬히 땅바닥에 대고 멍하니 앞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돌아누운 뒤에 다리를 굽히고 몸을 일으키려고 덩굴을 붙잡았다. 덩굴이 흔들리자 파리떼는 음침한 윙윙 소리를 내며 창자에서 날아오르더니 다시 그 자리로 육중하게 내려앉았다 사이먼은 일어섰다. 주위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별난 빛이 떠돌고 있었다. <파리대왕>은 검은공처럼 작대기에 꽃혀 있었다.]-216~217쪽
[그는 옆에 서 있는 세 소년들을 죄나 지은 듯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봉화가 가지고 있는 이중의 기능을 그가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째 기능은 말할 것도 없이 신호가 되는 연기를 올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기능은 모닥불의 구실을 해서 그들이 잠이 들 때까지 푸근하게 해주는 일이었다.]-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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