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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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百의 그림자』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문학의 잊지 못할 한걸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문장들
작가정보
목차
- 숲
가마와 가마와 가마는 아닌 것
입을 먹는 입
정전
오무사
항성과 마뜨료슈까
섬
후기
다시 쓰는 후기
책 속으로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처음엔 그림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덤불을 벌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저쪽도 길인가 싶고 뒷모습이 낯익기도 해서 따라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숲은 깊어지는데 자꾸 들어갈수록 뒷모습에 이끌려서 자꾸자꾸 들어갔다.(9면)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무재씨의 모습이 어쩐지 부옇다고 생각해서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니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자 눈꺼풀이 젖어서 묵직해졌다. 아래쪽으로 늘어진 열개의 손가락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입술에 고인 빗물의 맛이 짰다. 맥이 탁풀린 채로 얼마간 서 있었다.(11면)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42~43면)
이제 이야기해주세요.
차라리 노래할게요.
노래도 좋고요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목이 멘다고 해놓고,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하고
무재씨는 마무리까지 노래했다.
한번 더,라고 해도 못하겠다고는 하지 않고, 하얀 눈 위
에,라면서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었다.(105~106면)
그런 가게들 틈으로 난 골목,
이라기보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 정도로 보이는 어
둡고 좁다란 통로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간판도 탁자도
없이 점심배달 메뉴로 백반 한가지를 만들어서 파는 허
름한 식당이 있고, 그 맞은편에 오무사가 있었다. 칠십
년대 이후로 손을 본 적이 없는 듯 낡고 어두컴컴한 곳
이었다. 전구를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가게를 밝히는 전
구라고는 벽에 걸린 노랗고 푸른 알전구 다발뿐이었다.
빽빽하다.
라는 말의 이미지 사전을 만든다면 아마도 그런 광경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빽빽하다.(112~13면)
은교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124~25면)
은교씨는 뭐가 되고 싶나요, 행성하고 위성 중에.
나는 도는 건 싫어요.
혜성은 어떨까요.
혜성도 돌잖아요? 핼리 같은 것이.
핼리, 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유성은 어떨까요,라고 무재씨가 말했다.
유성이라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타서 사라지잖아요. 허망해.
허망하므로.(138~39면)
출판사 서평
도시의 폭력, 저절로 일어서는 그림자
그럼에도 선량한 사람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철거 직전 전자상가에서 일한다. 함께 일하는 이들과 떠난 여행에서 둘은 일행과 동떨어져 길을 잃고 헤매는데 여기서 은교는 자신의 그림자가 일어나 저절로 움직이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이후 ‘그림자’는 이 이야기에 환상성을 부여하는 존재이자 인물 각자의 아픔을 드러내는 실체로 기능한다. 『百의 그림자』는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전자상가라는 삶의 터전에서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이들의 거대한 옴니버스이기도 하다. 인물 각각이 지닌 그림자의 내력을 살펴보는 것은 도시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세목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그림자가 저절로 일어서는 비현실적인 일에 대해 익숙하다. 말하자면 그림자가 일어서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폭력과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이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현실에서 감당해낼 수 없는 일을 겪었을 때 그림자가 분리되는 현상을 겪는다. 그리고 그걸 따라가려는 충동을 느끼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기도 한다. 은교의 그림자가 처음 일어섰을 때 무재는 은교에게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10면)라고 말한다. 마치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은교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여씨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그가 처음 보인 반응은 “따라가지 말았어야지”(33면)다. 이들은 가족의 해체, 일터의 상실, 사랑하는 이의 상실 등 다양한 위기를 겪어왔다. 황정은은 이들의 이야기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 애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이라는 뜻의 “슬럼”(124~25면)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가, 나, 다, 라 마, 다섯개의 건물”(36면)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해낸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은교와 무재의 연애담이다. 길을 헤매고 나온 이후 둘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들의 연애는 어딘가 낯설다. 은교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 무재는 밤에 달려와 배드민턴을 쳐주고, 은교는 이미 먹은 점심을 모른 척 무재와 함께 먹기도 하지만 “몇주 동안”(83면) 따로 만나지 못하는 일도 있다. 이들은 이미 도시라는 거대한 폭력에 맞서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의 연애는 생계를 이어가면서 그 순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따뜻한 정종을 마시고 우산을 함께 쓰는 것, 운동장을 함께 걷는 것, 정전이 되었을 때 전화해주는 것, 노래를 불러주는 것, 그렇게 선량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윽고 마지막 장에서 두 사람은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 겪는 우여곡절과, 거기서 오가는 대사는 이 소설의 백미다. 그리고 그 대화는 자연스럽게 독자들이 살아가는 곳에 대한 질문과 성찰로 이어진다. 폭력과 현실의 무게에 맞서 살아가는 선량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하는 풍경으로.
한국문학 대표작가의 첫걸음,
지금이 바로 이 소설을 읽어야 할 때
출간 직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百의 그림자』는 2022년 KBS와 한국문학평론가 협회가 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리스트에도 선정되며 여전한 작품성을 과시한 바 있다. 특히 타워크레인 사고로 사망한 ‘유곤’의 아버지 에피소드는 최근 광주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를 비롯한 비극적인 사건사고를 상기시키며 여전히 도시에서 이어지는 죽음들을 돌이켜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百의 그림자』의 식지 않는 인기와 몰입도는 바로 어두운 곳을 향하는 따뜻한 시선과 사려 깊은 태도 때문일 것이다.
한편 황정은은 이 작품과 짝이 되는 새로운 소설을 2023년 출간할 것이라고 밝혀 커다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등을 수상하며 이미 한국문학 대표작가의 반열에 든 황정은이 다시 쓰는 도시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지. 그 스산하고도 따뜻한 풍경을 확인하기 위해, 『百의 그림자』를 다시 읽기 가장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36438715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2월 04일 | ||
쪽수 | 192쪽 | ||
크기 |
129 * 195
* 18
mm
/ 266 g
|
||
총권수 | 1권 | ||
원서명/저자명 | One Hundred Shadows/Hwang Junge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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