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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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되어 61편의 시를 수록했다. 흘러가는 청춘과 죽어가는 혹은 죽은, 고통 받는 이들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샤갈의 꿈」. 로망이 사리진 현실을 탄식하는 「더이상 로망은 없다」. 부조리가 일상이 되어버린 하루를 그려낸 「동어반복」을 비롯해서 겉으로 눈물은 흘리지 않지만 마음으로 더 쓰라리게 울고 있는 시인의 감성들은 내적인 리듬으로 담아 시들을 펼쳐낸다.
새해
제비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듯
그대에게 새해 선물을 청하였더니
금은보화 쏟아져나오는
흥부 박이 아니라
방망이 든 도깨비 불쑥 튀어나오는
놀부 박을 주었네
내 욕심이 과해서
제비 다리가 부러졌다나
비둔한 몸을 흠씬 두들겨맞고
그동안 이룬 것 모두 허사로 돌아갔으니
이 황폐를 다시 일궈야 하게 생겼네
혹부리 영감의 무거운 혹 같은 욕심주머니일랑
도깨비에게 감쪽같이 팔아버리고
슬근슬근 톱질하세
그대가 준 놀부 박에
묵은 해가 깨어졌네
작가정보
목차
- 제1부
새해
야생오리
거북이
벌레 먹은 대추야자나무
거미
청설모
맛조개를 캐는 일
감 따는 사람
유리창
화가의 방
카프카의 도서관
샤갈의 꿈
말죽거리 잔혹사
21그램
아버지와 딸
머리카락을 남기다
다시, 이미자와 김추자
어쩔 수 없는 일
동어반복
봄이 아프다
제2부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화살나무
징
시 귀신
흰 알약을 꿀꺽 삼켰을 때
어느 대낮 스치는 생의 풍경
해변의 모래예술가
짧고도 길어야 할,
도망가는 연인
목련꽃 지는 까닭
연꽃 못에 갔었네
색, 그리고 계
초경
엉덩이를 만지다
눈의 시인
희망
우문우답
멘델스존을 듣다
플로런스 젠킨스, 제 멋에 겨워 부르는 노래
직박구리의 귀
낡아도 좋은 것이 사랑뿐이랴
늙는 얼굴
판의 미로
제3부
드문 악기
불쌍하고, 불쌍하다
라라 파비안의 아다지오
오, 깜 보디아!
너의 돌팔매
물고기를 기억하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더이상 로망은 없다
소리는 소리로써 이겨야 하는가
절반의 나무
더부살이
펜은 삽보다 가볍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없다
벚꽃잎처럼
진양화원 옆에 사라패션
희망을 쓸 수 없는 시
촛불과 방패
21세기 시론
발문│장석주
시인의 말
책 속으로
가을 지나도 따지 않은 묵은 감이 / 눈 내린 한겨울 / 굶주린 직박구리들의 좋은 먹이가 되듯이, // (…) // 가수는 늙도록 노래한다 / 눈앞에서 멀어졌다가도 불쑥 되돌아오고 / 홀연 잊혀졌다가도 기어이 되살아나고 / 한동안 들리지 않다가도 노래와 함께 다시 귓전을 울린다 / 가수는 뒤늦게 노래하고 / 뒤늦은 노래가 더 뼈저린 노래임을 / 나는 한겨울 배고픈 직박구리의 귀로 듣는다
―「직박구리의 귀」 부분
당신이 낑낑대며 감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베면서 감을 따듯 / 생을 따고 시를 따는 사람이라면 /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감나무가 함께 겪는 노고를 더러는 안타깝게, 더러는 무료하게 바라보며 / 햇빛 받아 빛나는 은사시나무의 평화와 고요와 무료함이 생이자 시이기를 바라는 사람
―「감 따는 사람」 부분
내 시가 아름답지 못해서 / 새끼 고양이가 거리 한복판에 버려졌다 / 내 시가 힘주어 말하지 못해서 / 한 소녀가 거리에서 싸늘하게 발견되었다 / (…) / 이 세상에서 흉흉한 마음의 얼룩들이 가시지 않는 한 / 내 시는 계속 씌어지리라, 오래, 씌어져서 / 삶의 거친 나뭇결을 문지르는 사포가 되고 / 그 사포의 리듬을 따라 읊조리는 / 나직하지만 끊이지 않는 허밍이 되리라
―「21세기 시론」 부분
이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 / 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인 양 씨가 들어 있다 // (…) //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부분
출판사 서평
일상의 힘, 유장한 시의 여운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서 삶에 대한 빛나는 성찰을 길어내는 이선영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6년 만에 펴내는 신작시집은 그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더 깊어진 내면으로 일상의 누추와 소멸의 무상함을 견디며 절절하고 유장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시인은 벌써 20년 가까이 시를 써왔다. 당연하지만, 시인은 시인으로서만 살지는 않는다. 시인인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이고 어머니이고 생활인으로 그만한 시간을 살아왔다. 그는 평범한 일상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천천히 나이 들어가고, 그 평범과의 불화를 시의 재료로 삼아 삶에 대한 비범한 인식을 벼려왔다. 잘 알려져 있듯, 일상의 시간과 그 속에서 서서히 늙어가는 몸에 대해 그만큼 분명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도 드물지만, 그 자의식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짙고 정제되어 있다. “제 몸에 숨어들어온 바구미떼에 오래도록 갉아먹히는 채로 / 대추야자나무는 심어진 그 자리를 지탱하고 서 있을 뿐이다, 속을 다 털리고서도 / 바구미떼가 새로운 열매를 찾아 우르르 떠날 때까지 / 대추야자의 건재(健在) 속에 숨겨진 부재(不在)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벌레 먹은 대추야자나무」). 사막의 신산한 불모를 견디며 제 속에 키워온 과육을 통째로 털리면서도 대추야자나무가 그 자리에 가만히 붙박여 있듯, 이제 시인은 소멸과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오히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가을 지나도 따지 않은 묵은 감이 / 눈 내린 한겨울 / 굶주린 직박구리들의 좋은 먹이가 되듯이, // (…) // 가수는 늙도록 노래한다 / 눈앞에서 멀어졌다가도 불쑥 되돌아오고 / 홀연 잊혀졌다가도 기어이 되살아나고 / 한동안 들리지 않다가도 노래와 함께 다시 귓전을 울린다 / 가수는 뒤늦게 노래하고 / 뒤늦은 노래가 더 뼈저린 노래임을 / 나는 한겨울 배고픈 직박구리의 귀로 듣는다
―「직박구리의 귀」 부분
시인은 묵은 감이 아니라 굶주린 직박구리의 자리에, 뒤늦게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그 노래를 듣는 이의 자리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세월과 일상과 불화하는 시인에게 그 거리는 안온한 관조의 거리는 아니다. 시인이 짐짓 “유리창 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얼마나 평화로운가”라고 말할 때조차, 동시에 그는 “그럼에도 내가 질질 끌려가고 있는 저 바깥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의 투박하고 거친 손들이여 제발 / 나를 밖으로 꺼내려 들지 말라”는 진술도 실은 진심이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반성으로 다가온다(「유리창」). 그런 진술은 자주 자조적인 기색을 띠기도 해서, 시인은 “길가에, 방바닥에, 의자에, 읽던 책 위에, 스쳐온 누군가의 어깨에, 내려앉은 나의 머리카락들”을 보며 “내가 하고 다니는 일이란 고작 머리카락으로 길을 삼는 일”(「머리카락을 남기다」)이라고 씁쓸하게 내뱉기도 하고, 한때는 “불후의 시인이기를 꿈꿨”지만 “불멸이 아니라 멸렬함으로 줄기차게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불멸의 두 글자를 새겨넣을 만한 로망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탄식하기도 한다(「더이상 로망은 없다」). 그러나 자조(自嘲)는 또 자조(自照)이기도 하니, 시인은 지나간 청춘과 지리멸렬한 일상을 자조하는 형식으로 스스로를 깊이 비추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선영 시의 언뜻 익숙하고 평이해 보이는 산문투에서 순간순간 깊은 울림과 리듬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되돌아봄에서 오는 떨림이 시 전체에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대상과의 거리와 자신에 대한 내성이 절절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그렇다.
당신이 낑낑대며 감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베면서 감을 따듯 / 생을 따고 시를 따는 사람이라면 /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감나무가 함께 겪는 노고를 더러는 안타깝게, 더러는 무료하게 바라보며 / 햇빛 받아 빛나는 은사시나무의 평화와 고요와 무료함이 생이자 시이기를 바라는 사람
―「감 따는 사람」 부분
청춘은 흘러갔고, 세월을 견디는 일이 “죽음의 아가리가 조금씩 삶의 한귀퉁이를 먹어들어가”(「샤갈의 꿈」)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인이 모든 죽어가는, 죽은, 고통받는, 고통받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은 이라크의 어느 가족과, 부모가 맞벌이하는 사이 화재로 죽은 삼남매, 목매 죽은 노점상, 깜보디아에 추락한 한국 관광객들, 어린 딸을 남겨두고 자살한 대학강사에게 연민을 느낀다. 위암 걸린 할아버지,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 딸에게 돈을 꾸던 아버지, 종종 아버지 노릇을 해야 했던 어머니, 순두부찌개를 먹던 남자가 불쌍하고, 자신보다 더 오래 이 지구에 살아야 할 아이들이 불쌍하다.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는 모래알갱이 같은 돈과 / 종잇장같이 구겨지는 자존심과 / 반짝했다 꺼지는 공명심과 / 자기식 헤게모니를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는 무리, 우리들”까지도 불쌍하다. 그렇게 시인은 “평생을 나는 불쌍한 사람들하고만 살아왔다”고 단언하고(「불쌍하고, 불쌍하다」), 그 연민으로 또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조한다. 그것이 시를 이끌어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내 시가 아름답지 못해서 / 새끼 고양이가 거리 한복판에 버려졌다 / 내 시가 힘주어 말하지 못해서 / 한 소녀가 거리에서 싸늘하게 발견되었다 / (…) / 이 세상에서 흉흉한 마음의 얼룩들이 가시지 않는 한 / 내 시는 계속 씌어지리라, 오래, 씌어져서 / 삶의 거친 나뭇결을 문지르는 사포가 되고 / 그 사포의 리듬을 따라 읊조리는 / 나직하지만 끊이지 않는 허밍이 되리라
―「21세기 시론」 부분
그처럼 그의 시는 나직하지만 끈질기다. 성급히 밀어붙이거나 손쉽게 안주하는 대신, 주저하고 자조하기를 되풀이하면서도 삶의 누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쉼없이 걸어간다. 밝게 빛나지는 않지만 단단하게 응집된 그 정직한 의지가 시인에게 불모와 부조리의 삶을 견디게 하고, 그의 시에 낮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그 울림이 웅변하는 바는, 화려하고 매끈한 기교보다 진정성을 품은 정직한 내성이 진짜 시적인 것이라는 당연한 진실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무너질 수 없는 결심처럼 붙들고 있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끝내 자신의 미래이고 시일 것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 역설적인 빛남으로 다가온다.
이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 / 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인 양 씨가 들어 있다 // (…) //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부분
기본정보
ISBN | 9788936423049 | ||
---|---|---|---|
발행(출시)일자 | 2009년 07월 15일 | ||
쪽수 | 134쪽 | ||
크기 |
125 * 200
mm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창비시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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