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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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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이진선
저자 이진선(李鎭仙)의 아호는 이란(而蘭)이다. 성신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원교 이광사 서예론 연구」로 한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신여자대학교 한문교육과와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한문학과 서예를 강의하고 있다. 근묵서학회 학술이사로 논문 「유당 정현복 서예 고 찰」과 「난정서를 통해 본 ‘왕희지 서예의 특질’에 관한 소고」를 발표했다. 한국미술협회 초대작가로 주요 작품 활동은 개인전 1회와 예술의 전당 청년작가 초대전을 비롯하여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초대전, 남경서법가협회와의 한중서예교류전 등이 있다. 서예는 학예일치 속에서 진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 속에 문예부흥을 일으켰던 18세기 문예인들 간의 우정관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목차
- 옛사람이 이른 곳이 아니면 멈추지 않으리-들어가는 말 13
제1장 가문과 수학(修學) 23
제2장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다 57
제3장 스승과 벗 101
제4장 사상과 기질 123
제5장 18세기의 문예기풍과 동국진체 147
제6장 서예의 본질론과 심미론 193
제7장 올바른 필법과 결구 213
제8장 서예의 인식과 비평 251
원교, 진실한 학문과 서예만을 지향하다-맺는 말 287
서예용어 풀이 293
주요인물 소개 295
가계도 310
이광사 연보 311
참고문헌 313
찾아보기 317
출판사 서평
“옛사람이 이른 곳이 아니면 멈추지 않으리!”
유배지에서 꽃핀 학문과 예술
“서예에 마음을 둔 지 수십 년이 되고 닳은 붓이
거의 천 자루가 되어서야 겨우 얻기 어려운 것을 터득했다.
너무 즐거워하여 낮에는 밥을 잊고 밤에는 잠을 잊었으며,
여름에는 어쩌다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광사
“글씨의 획은 마음의 바탕에서 근원하고
의기의 극치는 학식의 도량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반드시 탁 트여 밝고 정직하며, 박학하여 문기(文氣)가 있는 이를 상대한 뒤에라야 글씨의 도를 말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비록 재주와 필력이 있어도 끝내 글씨장이가 될 뿐이어서,
비루한 속기에서 벗어나 현묘한 극치에 통한다고 해도
그 말단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광사
강화학파의 대표인물, 18세기 조선 최고의 전방위 예술가 이광사를 조명하다
한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서예는 오랜 세월 글을 다루는 문인들에 의해 발전되어왔다. 이들은 글을 통해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한문의 근간으로 닦아나가는 것처럼, 시문을 짓고 서예를 쓰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따라서 문인이라 함은 곧 서예가이자 화가임을 의미했다. 이들은 시문을 사상적 도구라 생각한 것처럼 서예의 본질도 손끝의 잔재주만은 아니라 여겼다. 서예란 첫째 전신을 전하는 도구요, 그다음은 뜻을 전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형태를 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서예전통을 이해하는 데,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77)는 매우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의 대표 서예가로, 양명학을 탐구한 정제두의 학맥을 이으며 강화학파*의 중심에 섰다. 문집 『원교집선』과 『두남집』 등을 통해 역사ㆍ문자학ㆍ그림에 상당한 조예를 보인 조선의 대표적인 전방위 예술가로, 우리에게 석봉 한호(1543~1605)나 추사 김정희(1786~1856)만큼 친숙하지는 않지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생존 당시 대중의 엄청난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왕손으로서 명필가문의 자제로 태어난 원교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였던 윤순을 스승으로 삼으며 최고의 학문과 예술을 전수받았다. 18세기 문예기풍의 주역들과 교유함으로써 원교는 이서, 윤두서, 윤순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맥을 이으며 자신만의 서체인 원교체를 완성시켜나갔다.
하지만 원교의 집안은 소론으로 영조 등극의 반대편에 섰기에 영조 등극과 함께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며 23년의 긴 세월 동안 궁벽한 유배지였던 부령과 신지도에서 지냈지만, 그는 비참했던 현실에 침식되지 않고 학문과 예술의 위대함만을 붙잡으며 고통을 극복한다.
“서예는 서예를 쓴 그 사람 자체다. 더욱이 원교에게 서예는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자존으로서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며, 꺾이지 않는 생명력의 발현이다. 서예는 그가 아무리 자신의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인정하려 해도 그를 힘겹게 누르는 생의 고통과 그 속에서 결코 짓눌릴 수 없었던 생명에의 의지였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기이할 만큼 원교가 튀어 그것이 마치 남과 다르고자 애쓰는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드러난 글씨의 기이함이 오히려 내면의 진실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삶의 본말과 선후를 분명히 아는 학자이자 서예가였다.”
-이진선
고통스런 유배지에서 꺾이지 않는 생명의 의지를 서예에 담다
『강화학파의 서예가 이광사』는 원교의 글과 글씨를 중심으로 그의 사상과 삶을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진선은 원교가 이 시대에 조명되어야 하는 까닭은 “단지 그가 서예가이자 강화학파의 사상가로서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 곧았던 그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라며, 삶을 의연히 대하던 원교의 태도를 강조한다.
나주괘서사건 당시 백부 이진유에 대한 연좌는 그의 형제들에게까지 미쳤다. 이진유의 형제들은 이미 사망했으므로 대신 원교 항렬의 형제들이 유형을 당하는 화를 입어, 원교의 여섯 형이 갑산부로 유배되고 열 명의 동생은 영남으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남편 원교가 극형을 받았다는 헛소문을 듣고 아내가 목매어 자진하는 비극마저 일어나 그야말로 원교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때 원교는 세상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임금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목숨이라며 ‘은령(恩齡) 1세’라 자처하고, 경학ㆍ패관잡서ㆍ문자학에 이르는 다양하고 넓은 지식을 『두남집』에 쏟았다. 또한 “우리 집안 온 식구가 산 채로 매장된 것은 오로지 백부 때문이나, 집안의 운수 탓이고 각자의 운명 탓이니 감히 백부를 원망하거나 탓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고는 다만 가화(家禍)를 입은 집안의 자손들로서 자숙하고 근신하는 것이 도리라며, 거짓되거나 과장된 마음으로 비열하게 남들에 빌붙어서 이름을 드날리기를 꿈꾸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다.
원교에게 서예란 단순한 글씨 쓰기로서의 서예가 아니었다. 재주를 발현하기 위함도, 그로써 허명(虛名)을 드날리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질곡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학문을 한 서예가로서 끝없이 진실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최고 미적 경지가 어디인지를 알아야만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다
서예전통의 영향과 향수 속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양과 정서의 함양을 위해 서예를 배우고, 오랜 숙련을 통해 전문 서예가가 된다. 이들은 서예본질에 대한 추구보다는 회화적 표현기법의 색다름을 통해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시대와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오늘날의 서예가들이 ‘서예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인식을 전제로 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원교의 서예의식은 다시 한 번 서예의 본질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원교가 살았던 18세기는 오늘날과 시대적인 차이가 있고, 범상치 않은 운명을 헤쳐나간 원교와 오늘날의 서예가들과는 그 처지가 다르다. 하지만 원교는 서법의 참된 도에 이르는 요건의 중요성을 말하며, 우선 서예의 본질이 무엇인지 서예가 이를 수 있는 최고의 미적 경지가 어디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바른길로 나아간다 함은 서예본질 밖에서가 아닌 ‘학문을 통한 올바른 필법’을 따르는 것으로, 오직 서법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자기 확신’ 속에 정진해야 참다운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저자는 오늘날 서예를 어떻게 정의하고 지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서예는 크게 달라질 것이며,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는 서예가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했다. 참된 학문과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원교의 사상을 담은 『강화학파의 서예가 이광사』는 독자에게 ‘오늘날에 학문과 예술을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의 답을 향한 디딤돌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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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학파: 조선 후기에 정제두를 비롯한 양명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한 학파다. 1709년(숙종 35) 정제두는 소론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강화도에서 은거했고 이후 이광사, 이광려(李匡呂), 신대우(申大羽), 심육, 윤순 등의 소론학자들은 함께 학문을 익히거나 혈연관계를 맺어 200여 년 동안 학맥을 이어나갔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의 설을 따르고 이기론(理氣論)을 사상적 기초로 삼았다. 실학파와도 손을 잡았는데 특히 북학파는 강화학파의 양명학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랏말인 정음의 연구에 힘써, 이광사의 정음연구를 이영익(李令翊)과 정동유(鄭東愈), 유희(柳僖) 등이 계승하였다. 서예에서도 윤순 이후 이광사가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만들었고, 이긍익, 정문승(鄭文升) 등은 산수화에 뛰어났다. 강화학파는 식민지 시대의 국학진흥에 힘썼던 정인보(鄭寅普), 한말 민족주의 학자인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김택영(金澤榮) 등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동국진체: 18세기에 이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윤두서, 윤순, 이광사 등으로 이어진 시ㆍ서ㆍ화단에서 일어난 문화현상을 말한다. 시에서는 사실주의로서의 진시와 기행시가 급속한 유행을 보였고, 그 시들을 그림으로 바꾼 듯한 진경산수화가 나왔다. 시와 그림의 흐름과 함께 서예에서도 동국진체라는 서풍이 생겼다.
***나주괘서사건: 1755년(영조 31)에 소론의 윤지(尹志)의 주도 아래 일어난 모역 사건으로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 윤지는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론을 제거하기 위해 아들 광철(光哲)과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들은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부류와, 소론 가운데 벼슬을 지낸 집안들을 흡수하여 1755년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다. 이것이 발각되어 윤지는 영조에게 직접 심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 김윤(金潤), 조동정(趙東鼎), 조동하(趙東夏) 등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이광사, 윤득구(尹得九) 등은 귀양에 처해졌다.
기본정보
ISBN | 97889356622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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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출시)일자 | 2011년 03월 15일 | ||
쪽수 | 321쪽 | ||
크기 |
135 * 185
* 30
mm
/ 50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한길인문학문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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