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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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쇄술의 역사를 뒤바꿀 발견, 《남명증도가》에 숨겨진 비밀과 진실
작가정보
정통한 불교서지학자이자 고려대장경 연구의 권위자. 우리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연구하고 대중에 알리는 작업에 오랜 시간 천착해왔다. 불교학으로 동국대학교에서 석사학위, 일본 동경 대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전문위원, 문화관광부 심의위원(전통 사찰),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 프랑스 외규장각도서 환수 자문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위원, 국립산악박물관ㆍ국립항공박물관ㆍ송파책박물관 등 국공립박물관 평가자문위원이자 한국전적문화재연구소 소장,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1990년대 이래 전적조사연구회를 꾸려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을 50여 차례나 오가며 해외에 유출된 우리 고서를 조사했다. 특히 2011년 일본 궁내청 소장 도서 1,205책을 돌려받을 당시 반환 실무협상에서 한국 측 대표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공로로 문화재청장 표창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동안 〈해인사대장경판 재고찰〉〈의천의 교장〉〈고려대장경의 진실〉〈국외전적문화재 환수와 그 과제〉 외 다수의 논문과, 《신라사경 대방광불화엄경》 《전국사찰소장 목판집》《사경》《한국의 책 문화》《세계 최고의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고려대장경판의 판각과 남해》 등의 책을 썼다.
목차
- 책을 펴내며
재판을 내면서
1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무엇인가
선가의 수행 지침서, 《영가증도가》
깨달음의 진면목을 설파한 《남명증도가》
현존하는 《남명증도가》 판본
2장 《남명증도가》를 둘러싼 미스터리
최이의 지문 재검토
왜 공인본은 목판본으로 잘못 판명되었나-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중심으로
공인본은 삼성본과 동일본이 아니다
3장 공인본 《남명증도가》는 최초의 금속활자본
너덜이
획의 탈락
보사
활자의 움직임
뒤집힌 글자
활자의 높낮이에 의한 농담의 차이
4장 다시 써야 하는 우리나라 인쇄의 역사
불교 경전 신앙과 인쇄술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
우리나라의 금속활자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과 연구
부록 1
《영가증도가》와 《남명증도가》의 현존 판본 목록
《남명천화상송증도가》 한글 완역본
영문 초록
일문 초록
찾아보기
부록 2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영인본
책 속으로
공인본은 삼성본과 동일본이 아니고 금속활자본인데, 왜 원로 교수의 연구논문과 문화재위원들은 공인본을 삼성본과 동일한 목판본으로 결론 내린 것일까? 문제의 핵심을 다시 처음부터 살펴본 결과 공인본과 삼성본 권말에 붙은 최이의 지문을 번각본(복각본)의 지문으로 오해한 탓임을 알게 되었다. 1239년 당시 최고 권력자 최이가 쓴 지문은 번각본 간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금속활자 간행을 위한 지문이었다. 이 사실을 밝히는 데는 우리나라 최고의 한문학자 이정섭 선생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아마도 최이의 지문에 대한 최초의 검토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인본은 삼성본과 동일한 목판본이 아니라는 증거들은 각 장의 좌우 광곽과 글자 등에서 무수하게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_p.8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권말에 수록된 최이(?~1249)의 지문은 목판본과 활자본을 구별하는 열쇠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서지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이 지문은 1931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도서관 주최 ‘조선 활자 인쇄 자료전’에 가미오 가즈하루의 소장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전시되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 후 1954년에 서울대학교와 연희대학교 전시회에 김두종 선생의 소장품이 출품되었는데, 이때 최이의 지문에서 주자(鑄字) 관련 내용이 소개되었다. 김두종 선생은 1960년에 발표한 〈고려주자본의 중각본과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논문에서 최이의 지문을 번각본의 지문으로 판단했다. 이 책은 이미 몇 번에 걸쳐 번각된 심원사 판본이었다. _p.24
무엇보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이가 번각본에 지문을 쓸 명분이 있었을까? 최고 권력자가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보급과 전승을 위해서라면 명필에게 부탁하여 판하본을 새로 작성하여 반듯하게 새겨 간행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번각본은 당시 최고 권력자가 지문을 써줄 정도의 판본이 아니었다. 최이가 흉ㆍ허물을 모두 지닌 주자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각하고 지문을 써서 붙일 정도는 아니었다. 번각본에서는 저본의 허물을 수정해서 간행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최이가 지문을 써준 것은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가 성공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_p.30
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 분야에서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창출해낸 기구이다. 우리나라에 수없이 많은 자문위원회 가운데 유일하게 결정권을 지닌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문화재위원 출신이기에 위원회의 결정은 모두 타당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근래에 다시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판단을 잘못한 사례가 발견되었다. 첫 단추는 1984년에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보물로 지정되면서 금속활자본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번각본이고, 특히 권말에 붙은 최이의 지문에 ‘중조주자본’이란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금속활자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삼성본은 고려본의 형태를 지닌 번각본이었기에 최이의 지문은 목판으로 번각할 때의 간행발문으로 이해하였다. _p.34
획 탈락과 마찬가지로 역시 주물이 내려앉아 인출 시에 획이 탈락된 부분을 새로 칠하는 보사를 했는데, 주로 알아보기 쉽게 하느라 보사했다. 주조 기술의 부족으로 글자의 전체 또는 획이 결락되어 가필한 글자가 제법 많다. _p.111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에는 뒤집힌 글자가 있다. 이에 대해서 서예전문가 손환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나라 사경 기능 보유자 김경호에게 문의한 결과도 동일하였다. 여기 제시된 여섯 글자는 활자를 조판할 때 뒤집힌 글자들이다. 조판 당시 뒤집힌 것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인쇄한 것이다. 삼성본은 ‘23b 5-3’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로잡아 판각하였다. _p.122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권말에 최이의 지문이 붙어 있는 것은 최초의 금속활자 간행은 무신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반증한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초조대장경판이 1232년에 불타버려 한창 《대장경》을 판각하던 시기였다. 당시 전국 사찰의 각수들은 《대장경》 판각을 위해 모두 남해로 차출되었으므로 수선사에서도 더 이상 필요한 서적 인쇄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목판 대신 금속활자 인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고, 고려시대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이와의 인연으로 탄생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그 당시 전폭적인 후원을 받던 수선사에서 간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_pp.140~141
출판사 서평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다!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새로운 금속활자본의 탄생
불교서지학ㆍ고려대장경 분야 권위자 박상국 박사가
금속활자의 진실을 규명하고 다시 쓰는 한국 인쇄의 역사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김영사 刊)는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금속활자본임을 밝히는 최초의 증명기다. 이 책은 동일본이라고 알려져 함께 보물로 지정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과 삼성본이 사실은 다른 판본이며 공인본은 금속활자본, 삼성본은 목판본이자 후쇄본임을 다양한 비교 연구를 통해 증명한다. 가장 논란이 된 〈최이 지(誌)〉(최이의 지문) 재검토부터 금속활자본과 목판본의 특징과 차이에 대한 분석, 우리나라 역대 금속활자본에 대한 논문을 모두 검토하는 등 역사적ㆍ학문적 고증과 더불어 오랫동안 한국 금속활자 역사와 문화에 대해 그 실체를 낱낱이 밝혀냈다.
먼저 이 책에 대한 소개가 필요한 것 같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당나라 현각이 중국 선종의 6조인 혜능을 직접 배알한 후 크게 깨달은 심정을 서술한 《증도가》에, 송나라 남명선사 법천(法泉)이 계송(繼頌)을 붙여 내용을 알기 쉽게 밝힌 책이다. 현존하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모두 10여 종. 그중 4책이 동일본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 중인 삼성본(보물 제758-1호), 공인박물관에 소장 중인 공인본(보물 제758-2호), 대구 스님 소장본(문화재 신청 중), 개인 소장본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검토해본 결과 공인본은 금속활자본이고, 다른 3종의 책은 금속활자본을 번각한 각기 다른 판본이었다.
참고로 2017년에 열린 동산문화재 위원회 회의록을 다시 살펴보면, 〈보고서②〉에서 대구의 개인 소장본을 “현존 자료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므로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472년에 쓴 인경발문이 고의적으로 제거되었으므로 지정은 보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며칠 전에 삼성본은 고려본이 아니며, 더구나 15세기 이전은 아니라고 이 회의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해 전해 들었다. 그렇다면 1984년 삼성본을 지정할 때 1239년에 판각하여 후쇄한 고려본이라고 감정했기 때문에 〈최이 지〉를 목판번각본 간행기록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삼성본은 고려본이 아니라면 권말의 〈최이 지〉는 삼성본의 간행기록이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최이 지〉는 당시 최초로 주조한 금속활자본의 간행을 축하한 기록이다.
필자에게는 이 책을 발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와 과정이 있다.
이 책은 ‘책을 펴내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필자가 근무했던 문화재청의 청장을 역임하신 분의 소개를 받고 찾아오신 스님의 책을 문화재 지정을 위한 검토원고 부탁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정년퇴직 이후에도 일 년이면 2~3건씩 문화재 검토의견을 부탁받고 있었다. 스님이 가져오신 책은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인데, 많은 학자들이 목판번각본으로 감정하고 있으므로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밝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예약된 일이 있어 3개월 후에 검토해드리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후 가끔씩 확인하면서 20년 만에 만난(뒤에 안 사실이지만) 스님에게 왜 금속활자본이 아닌지를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토과정에서 목판번각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이 책은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왜 금속활자본이 아닌가에 대한 상세한 검토의견을 써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인데 문화재 지정 사실을 알고 몹시 당황하였다. 자다가 몇 번씩 일어나고 잠까지 설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왜 이런 상황에 도달했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먼저 2012년에 공인본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권말에 〈최이 지〉가 삼성본과 동일하게 붙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판본이라고 판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삼성본은 1984년에 보물 제758호로 지정하면서 권말에 붙어 있는 〈최이 지〉를 목판번각본의 지문으로 잘못 생각하였던 것이 그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고려본 판식을 지니고 있는 활자본의 번각본인데, 권말에 붙어 있는 〈최이 지〉를 목판번각본의 지문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이 지〉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여 보았고 그 결과 금속활자 지문으로 판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인본은 금속활자본으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도 금속활자 주조 초창기의 활자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활자들로 간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공인본은 금속활자 발명 초창기가 아니면 간행할 수 없는 수준의 금속활자본이었다.
그렇다면 “1239년에 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간행하였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정상적인 금속활자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고 서툰 금속활자로 간행한 많은 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속사정을 갖고 탄생한 금속활자본이었다.
여러 각도로 유추해본 결과 공인본은 1239년에 조계산 수선사(현 송광사)에서 금속활자를 처음으로 주조하여 최초로 간행한 판본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 최이가 금속활자 발명을 기념으로 ‘지’를 써주었던 것이었다. 당시 조계산 수선사는 보조국사 이후 고려 선종의 종갓집 역할을 하였고 때마침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려(1232) 전국 각 사찰의 각수는 모두 남해 대장도감으로 대장경 판각에 동원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때 당시 무신정권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던 수선사에서는 선종서적 간행이 필요하였고 금속활자 주조를 시도하여 1239년에 겨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몽항쟁이라는 당시 형편으로 지방의 사찰에서 금속활자 인쇄를 지속 발전시키기는 역부족이어서 도로 목판 인쇄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려시대 금속활자에 대해서 선배들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궁금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금속활자에 대한 논문을 찾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국의 금속활자 연구가 이미 1882년에 영국의 어니스트 사토, 1900년에 프랑스의 모리스 쿠랑, 1906년 일본의 하야시 다이스케 등 주로 외국학자들에 의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외국학자들의 논문을 통해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에 대한 전후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공인본이 우리나라 금속활자 발명 직후에 간행한 초창기의 금속활자본이라는 확신을 갖는 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외국인들이 쓴 논문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문화적인 자존감을 세상에 널리 알려주었다. 이러한 자존감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어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국인에 의해 새롭게 밝혀졌던 많은 사실들은 우리가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자부심만을 앞세우며 면밀한 검토도 없이 성급하게 주어 담아 역사 문화적인 사실을 왜곡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엉뚱하게 추단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 금속활자에 대한 선배들의 연구업적을 살펴본 결과 고려는 1239년에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몇 차례 금속활자 인쇄를 시도하였지만, 계속하여 발전 지속할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 후 고려시대는 금속활자의 매력을 못 잊어 몇 차례 시도해보았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잘 말해준다. 1378년 동일한 시주자에 의해서 동일한 책을 간행하면서도 금속활자 번각이 아니라 판하본을 다시 써서 목판본을 간행했을 정도였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였지만, 지방의 사찰이 중심이 되어 간헐적으로 몇 차례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간행해보았으나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금속활자나 그 주조 기술이 전래되어 금속활자의 꽃을 피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1392년 1월 서적점을 서적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내게 하겠다는 기록이나 조선조 개국공신 정도전이 금속활자 주조를 독려한 사실은 고려가 금속활자 인쇄가 지속되지 못했기에 이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실이지 실행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금속활자본인 공인본과 목판본인 삼성본을 비교ㆍ분석해서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먼저 1장에서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어떤 책인지,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판본이 얼마나 있는지를 모두 조사하여 분석했다. 2장에서는 그동안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목판본으로 판명됐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장 논란이 된 〈최이 지〉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에 대한 재검토 과정도 모두 담았다. 결국 최이의 지문에 대한 오해로 동일본이라 하였으나 동일본이 아니었다.
3장에서는 공인본과 삼성본이 동일한 판본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공인본은 동일한 목판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임을 밝혔다. 그리고 공인본에는 금속활자본의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음을 상세히 밝혔다. 그것도 초창기의 금속활자본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너덜이, 획의 탈락, 광곽, 보사(補寫), 활자의 움직임, 뒤집힌 글자, 활자의 높낮이에 의한 농담의 차이 등이 금속활자본으로서는 처음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공인본의 이런 점이 금속활자 발명 이후 처음으로 간행한 책임을 알게 해주었다.
4장에서는 공인본의 역사적 위치가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우리나라 인쇄술의 역사를 개괄해보았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미국 등 외국학자들에 의해 한국의 금속활자가 연구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국가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수한 문화민족으로 자존감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외국인들에 의해 형성된 성과에 의해서 금속활자 종주국이라는 칭찬에만 더불어 춤췄다. 저자는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지방의 사찰이 중심이 되어 간헐적으로 몇 차례 서적을 간행했을 뿐이며, 그마저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다시 목판 인쇄로 회귀했다고 일침하였다.
마지막 부록에는 공인본의 한글 완역과 영인본 전문을 실어, 이 책이 낯선 독자들이 그 내용을 파악하고 금속활자본의 면면을 오롯이 살펴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은 역사와 문화를 다시 써야 하므로 불명확한 부분은 수정하게 되었고, 영문과 일문의 초록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출판사와 여러 인연 덕분으로 초판에 이어 바로 재판할 수 있게 되었다.
■ 가장 논란이 된 〈최이 지〉에 관한 해석
: 최이가 지문을 써준 것은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1984년 처음 등장한 삼성본 권말에 붙은 최이의 지문을 번각본의 간행 지문으로 오해한 것이 논란의 시작이었다. 최이의 지문 가운데 목판본으로 오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부분 즉, ‘어시모공 중조 주자본(於是募工 重彫 鑄字本)’인데, 이를 “주자본을 다시 주조하여”, “거듭 주조하여”라는 뜻으로 밝혀졌다. 여러 차례 거듭하여 주조하였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저자는 우리나라 최고 한문학자 이정섭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이가 굳이 번각본에 지문을 쓸 명분이 없는 것이다.
이외에 뒤집힌 활자 한일자(一)에 대해서는 손환일 교수가 지적하여주었고, 목판본에서 흔히 나타나는 할렬ㆍ목리문 등 일반적 현상들이 공인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충북대학교 목재종이학과 최태호 교수팀이 과학적인 분석으로 밝혀주었다.
기본정보
ISBN | 9788934992882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6월 01일 |
쪽수 | 348쪽 |
크기 |
201 * 269
* 28
mm
/ 1094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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