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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시간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오래 입어 해진 스웨터를 걸치고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어머니는 늘 시간을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이제 어머니는 시간의 먹잇감이 되었다
시간은 이미 귀를 먹어치웠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은
왼쪽 발목 관절을 먹는 시간의 입가에
어머니가 먹은 시간이 질질 흘러내렸다
시간은 사람을 먹어 작아지게 한다
기억을 먹어버리고
안경 너머 짓무른 눈에는 끈끈한 침을 발라놓았다
이 빠져 흉한 사기그릇처럼
군데군데 이빨마저 먹어치웠다
시간 앞에 먹이거리고 던져진 육신
어머니는 이제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았다
오늘도 어머니는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기다렸다는 듯
시간은 어머니 오른쪽 무릎 관절에 입을 대었다
먹히던 시간이
무서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정보
목차
- 제1부
여인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연탄
미끄러운 날
터널
추락
매달리기
망원렌즈만 달린 사진기가 있다
그리움은 발등을 찍는다
사연
손올 씻는다
무화과
그대 곁에 가는 길
들리지
두고 온 것이 있다
눈을 쓸며
너 걸렸지?
감꽃 진 뒤
아버지와 자전거 1
제2부
간잽이
8월의 밥그릇
미역귀
자월도 가는 길
옆
소주 반 병
소래포구 철길에 앉은 조새
상갓집에 벗어논 양말
사막에서 살아남기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뒷고기
대리운전
닭발
낚시
구토
겨우살이
제3부
복사하기
거리에서 먼지를 털며
고치는 가볍다
나를 기다린다
어딘가 닿아서
배추밭에 앉아
우울한 염소
모르는 일들
바늘쌈지
인연
질문
동인천 지하상가
레몬 마켓
덫칠
구두 소리
해설
출판사 서평
“결핍과 고통에 맞서는 시간의 힘”
정진혁의 첫 번째 시집 『간잽이』가 발간되었다. 2003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시집 『간잽이』로 제1회 구상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가족의 궁핍과 죽음의 이중주, 그것이 이번 시집의 정서를 촉발시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편들 속에서 미학적으로 세련된 시편들은 바로 이러한 정서를 자연의 사물과 교감시킨 것들이다.
이번 첫 시집에서 시인이 그리는 대표적인 풍경은 ‘궁핍하고 지난한 가족사의 풍경’이다. “한전 수금사원”인 아버지가 이끌어가는 궁핍한 일상은 “변두리 동네”, “비탈길”, “터널”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시집 속의 현실을 가득 채운다. 이러한 남루함에 “작은 누나의 죽음”은 신산함을 덧씌운다.
시인은 1부의 작품들, 특히 「무화과」 에서 숨어 있는 무화과 꽃의 모양을 통해 누나의 신산한 삶과 죽음의 속성을 찾아낸다. 무화과(無花果)는 그 명칭 그대로 꽃이 피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꽃이 피는 식물이다. 시인은 무화과 꽃의 속성과 누님의 존재를 “숨죽여”라는 어휘의 질감에 버무려내며 누나의 비극적인 생애를 끌어안는다. “아름다운 봄날/누나는 무화과처럼 속으로 속으로/숨죽여/핀다”는 표현이 그러한 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삶의 현실을 내성화하는 시간”
결국 시인이 그린 ‘궁핍하고 지난한 가족사’의 아픔을 이겨내도록 해주는 요소는 바로 “시간”이다. 삶의 현실을 내성화하는 시간성, 감추어진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시간성의 역할이 그의 시 세계를 인도하기에 가난과 고통은 삶의 회부 현실에서 확인되고 극복되어할 문제로 처리되기보다 내면의 문제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이렇듯 시인은 시간성을 매개로 가족사의 궁핍과 고통을 내성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내성화의 방편으로는 “견디는” 마음가짐과 “그리움”, 이 두 가지가 있다. “견디는” 마음가짐과 “그리움”을 잇는 역할을 하는 자연의 속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승하는 자연의 사물들, 바로 그것들이 추락하는 현실의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두고 온 것이 있다」의 화자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자연의 사물에서 그리움을 발견하고 위안을 얻는다.
내 황량한 마음에 꽃잎 비추는 날 / 다시 갈 수 없는 먼 곳에다 / 두고 온 것이 있다
누나는 생의 끝을 말아 쥐고 갔다 / 꽃잎의 문을 열고 가는 누나를
바라보기만 했던 / 지워지지 않는 꽃밭
매콤한 향이 눈가를 흐리게 하는 / 한련화 꽃잎에는 누나의 옷자락이 있다
두고 온 그녀를 꽃잎 속에서 꺼냈다
그녀의 손길과 두고 온 시간이 빼곡이 들어차 수놓은 / 그리움의 잎맥
뺨을 흐르며 무늬가 내게로 왔다
-「두고 온 것이 있다」 부분.
“꽃잎의 문을 열고 가는 누나”라는 표현에서 자연의 사물은 죽음의 세계를 열어보인다. 여기서 화자는 “두고 온 그녀를 꽃잎 속에서 꺼냈다”라고 토로한다. 바로 “그녀의 손길과 두고 온 시간이 빼곡이 들어차 수놓은/그리움의 잎맥”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움이 집적된 시간의 속성은 죽음의 세계로부터 누나를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련화의 꽃잎은 그리움의 시간성을 열어 보이며, 꽃잎 밖에서 흐르는 현실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게 만들고 화자의 마음을 치유한다.
“궁핍과 상실을 그려내는 건강한 서정”
정진혁의 이번 시집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마음은 이렇듯 현실의 궁핍과 지난함을 견디고 지우는 그리움의 시간적 속성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자연 그 자체의 싱싱한 활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묘파해내고 있다.
▶ 추천의 말
정진혁은 폭 넓은 소재를 채집하여 안정된 호흡으로 시를 형상하는 진술과 구성 능력을 가진 시인이다. 내가 그의 시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시에 등장하는 인물의 일상과 제재들이 민중서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인물과 화자는 “방 하나가 전부인 집”에 살며, 남편을 여읜 여인이 도시 산동네에 와서 가난한 생을 보내고, 공단에 기대어 사는 이주노동자들이 깃들어 살고 있다. 이들 돈과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사막’의 고투에서 낙오하여 고통을 겪는 인물들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조갯국물 같은 진한 슬픔”과 “생의 비릿함”이 몸을 휘감는 느낌을 받는다.
-공광규(시인)
▶ 시인의 말
사는 일이 늘 축축하고 냄새가 났다
가만히 있어도
언제나 흘러다녔다
냄새는 수치심을 동반했고
수치심은 도피 성분을 지녔다
냄새가 절망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
미미한 인간사의 일부가 눈에 보였다
작은 호흡, 틈, 흔들림, 무늬, 그림자……
밖엔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고
내겐 안이 없었다
그 작고 소박한 것을 찾으며
나도 미립자가 되어갔고
잘 발각되지 않았다.
- 2010년 능허대에서
기본정보
ISBN | 9788933811559 | ||
---|---|---|---|
발행(출시)일자 | 2010년 08월 23일 | ||
쪽수 | 131쪽 | ||
크기 |
128 * 210
* 20
mm
/ 20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세계사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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