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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목차
- 1부
물가에서 우리는
모든 가구는 거울이다
식탁의 목적, 물컵
식탁의 목적 혹은 그 외의 식탁들
식탁의 목적, 냉장고 불빛
식탁 자리
식탁의 목적, 그러니까 우리는
식탁의 오래된 풍경
여름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종점들
당신이나/그 앞에 앉은 나나/귀신같아서 좋은 봄날의 소풍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여름비
2부
우리는 모두 물방울이 아니다
공원
캐치볼
미끄러지는 세계
공원 2
한밤의 셔틀콕
폐허는 언제나 한복판에서 자라고
살이 부러졌다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
떠내려가는 금요일
43일의 43일이 43일 동안
사과 상자는 쌓여가고
3부
곁
밑
잠
잠 잠
곁
홀연
그네
워터볼
또다시 종점들
패전 처리 투수
재워주고 싶어
붉은 방
학교생활
학교생활-칠판
학교생활-상담실
익어가는 것들은 왜 매달려 있는가
4부
자전
화분 혹은 시인 케이
달리는 저녁
당신의 세계
두 번째 엽서
하염없이
파주
파주 2
파주 3
파주 4
파주 5
파주 6
파주 7
파주 8
파주 9
파주 11
파주 12
책 속으로
발을 씻는다
버드나무처럼 길게 발가락을 내어놓는다
세상의 모든 염려를 품고
울음을 참고 있는 나무들이 있어
오늘 당신과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이 캄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 발이 물속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눈이 없는 물고기처럼 당신의 발등에서 조금 자려고 한다
이제 더는 애쓰면서 살지 말아요
어떻게든 사는 건
하지 말아요
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없었으므로
이제 나는 눈 없는 물고기로 살거나 죽거나
당신 옆에 눕고 싶은 것일 뿐
상처 가득한 지느러미가 환해질 때까지
달빛이나 축내면서
어떤 당부도 희미해진 지금
말간 물이 발목에서 뒤척이는 건
마치 어떤 전생 같아서
몽유의 날들을 세어본다
세어보는 손가락이 붉어져서
물가의 나무들은 속으로만 발가락을 키운다
-「물가에서 우리는」, 12쪽.
해변의 묘지 같아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 동안 나 없이도 식탁은 식탁이다. 공중에 떠 있는 바닥이라니 공중에 떠 있는 바닥이라니 가끔은 그 높이를 매만지며 낯설어지는 얼굴을 오래 떠올려보았지만 식탁의 에피소드는 끝났다. 낮이 지워지고도 밤이 오지 않았다. 유령처럼 그림자들이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든 이들은 깨우는 게 아니야. 창문을 닫으며 내게 남은 마지막 표정 하나를 내려놓았다. 11월이 시작되고 있었고 죽은 벌레들이 잘 말라가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밥을 먹고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식탁 위에는 바다, 아니고 모래, 감쪽같이 지워진 발자국을 따라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부르던 노래들이 가득했다. 마주 앉은 얼굴은 자꾸만 멀어져서 해안선이 생겨난다고 나는 이제 없는 너의 다리를 발로 툭툭 찬다. 바닥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나는 몇 개의 입술을 몰래 주워 넣고 말없이 밥을 먹는다. 고요해서 밥을 먹는다.
-「식탁의 목적, 그러니까 우리는」, 22쪽.
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 데나를 양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옷을 지어 입으면
등은 따뜻할까요
머뭇대다가 지나친 정거장들이
오늘 별로 뜨면
이제 어떤 먼 곳도 그립지 않을 테죠
모든 것의 뒤만 볼 수 있는 세상
갑자기 당신이 이해돼버렸어요
지하 계단을 밝을 색으로 칠해볼까요
거기 막 떠난 물방울을 그려 넣기로 해요
켜켜이 폐허의 지층을 닮은 물방울들이
물그릇에 담겨
무엇으로든 막 자라나는 동안
끝에 기대어
당신에 기대어
함께 지워질 수 있다면
-「종점들」, 30쪽.
우리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았으므로
유서를 쓰는 중이다
또박또박 비가 온다
끝에 닿아보자고
비로소 한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흘러갈 수 있다고
좋아서 좋아서
서로를 조문하는 중이다
-「여름비」, 36쪽.
공을 던진다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만큼씩 나의 뒤는 깊어진다
내가 혼자여서 나무의 키가 쑥쑥 자란다
내가 던진 공은 자꾸만 추상화된다
새들은 구체적으로 날아가다가 추상화되고
생기지 않은 우리
속으로 자꾸만 공을 던진다
거짓말처럼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오는 것들은 일렬로 내 앞을 지나간다
칸칸이 무엇도 눈 맞추지 않고
잘 지나간다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추상적이다
나는 불빛 아래에서 살았다 죽었다 한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공을 던진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캐치볼」, 40쪽.
여기는 다녀가는 세계. 동의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마음들. 낮의 식물들은 불안으로 잘 자라고 밑그림 속을 걸어가는 내가 아는 사람들도 곧 떠난다. 완성되지 않는 그림들이 이 세계의 완성이라고 공원의 저녁 속에서 조금씩 말라가는 잎사귀들 체온들, 공원은 어느 순간 아주 사라지기도 한다. 그 속에는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래처럼 잠들어 있기도 하다. 잠 못 드는 고양이가 훔쳐보던 어둠도 있다. 불빛도 있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기다리는 마음들이 모여 공원의 세계는 완성된다. 버려지고 잊혀진 마음들이 반짝 별로 뜨는 이유다. 그러나 공원이 아주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지금 여기는 다녀간 것들의 이름으로 남은 세계. 윤곽을 지우며 지나간 사람들의 내일이 둥둥 떠다닌다. 빈 술병 하나가 햇살에 반짝 죽고 있다. 희고 빛나는, 내가 없는 세계.
-「공원 2」, 43쪽.
가로등 아래에서 너와 난 셔틀콕을 보낸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셔틀콕을 따라다녔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나도 내게 있는 힘껏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 셔틀콕을 따라 밤이 흩어진다. 흘러간다. 직선 같은 곡선의 음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킥킥거리는 공원에서 사람들은 둥글
출판사 서평
세상에서의 부재가 되는 일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너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재의 이미지를 담담한 목소리로 담아낸다. 이 부재의 대상은 네가 되기도 하고 내가 되기도 하며 종종 세계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런 쓸쓸함이나 불안함에 대한 정서는 종종 너와 나 사이의 놀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을 던진다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만큼씩 나의 뒤는 깊어진다
내가 혼자여서 나무의 키가 쑥쑥 자란다
내가 던진 공은 자꾸만 추상화된다
새들은 구체적으로 날아가다가 추상화되고
생기지 않은 우리
속으로 자꾸만 공을 던진다
거짓말처럼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오는 것들은 일렬로 내 앞을 지나간다
칸칸이 무엇도 눈 맞추지 않고
잘 지나간다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추상적이다
나는 불빛 아래에서 살았다 죽었다 한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공을 던진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 「캐치볼」 전문
캐치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놀이, 공을 던져주고 받아주는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놀이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너는 부재하고 있다. 네가 없기에 우리 또한 생기지 않은 상태로 나는 자꾸 속으로만 공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모순된 과정 속에서 모든 것들은 추상화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을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혼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결국 ‘너’와의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구절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부재를 통한 아이러니하고도 쓸쓸한 유희의 순간은 이번 시집의 여러 시들에서 발견된다. 그 순간은 너와 내가 시소를 타는 동안 잠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시소의 세계이기도 하고, 너와 내가 배드민턴을 치면서 눈으로 셔틀콕을 치는 동안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세계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부재에 대한 반짝이고도 쓸쓸한 인식들은 내가 속하지 않은 공원의 세계, 세상에서의 부재로 향한다. 말하자면 이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들로 반짝여보는 일이다.
세상에서의 부재가 되는 일
세상에 없는 나를 만나는 일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부분
여름, 융성해지는 폐허의 계절
시인에게 여름은 폐허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이라는 시집 제목도 그렇지만, 시집 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이 여름이라는 계절이다. 여름이 폐허라는 말은 모순적이기에 듣는 이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킨다. 여름은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생명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융성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름은 당신이 이 세상에 보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
-「여름」 부분
나는 그렇게 시들어가는 꽃과 살았다 반쯤만 살아서 눈도 반만 뜨고 반쯤만 죽어서 밥도 반만 먹고 햇볕이 환할수록 그늘도 깊어서 나는 혼자서 꽃잎만 피워댔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부분
질문과 대답이 그렇게 여러 해를 떠돌고서야 여름을 기다리곤 했지 그래도 여름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잊으면 되고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부분
그래 집에 가자 내일부터는 여름이 아니라고 말하자
이 생은 벌써 끝났다고 말하자
-「학교생활」 부분
이러한 융성의 계절에 시인은 오히려 폐허와 부음과 유족에 대한 생각 들을 떠올린다. “햇볕이 환할수록 그늘도 깊어서”라는 구절에서 언뜻 비치듯, 넘치는 빛 속에서 자라나는 존재의 가장 젊고 생생한 한 순간이 역설적으로 그 존재가 늙고 죽어갈 때의 모습을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일까. 많은 경우 이번 시집 속에서 여름은 죽음이거나 또는 죽음을 환기시키는 삶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것들에서 두려운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체념과 기다림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마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라 불리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식탁 위에서, 공원에서, 학교에서, 혹은 파주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혼자’, 또는 부재하는 ‘우리’에 대한 섬세한 언어들로 가득한 시집이다. 나와 너 사이의 거리, 생과 죽음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마냥 쓸쓸하지만 않은 것은 황정산 평론가가 해설에서 밝히고 있듯 “서로 간에 멀어짐을 허용할 때 서로는 별빛으로 반짝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불가능한 미래의 기호들
높고 쓸쓸한 시인의 행보가 시집 곳곳에 다양한 무늬로 새겨져 있다.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의 숨결이 밀어 올리는 ‘혼자’의 대척점에 ‘우리’가 있다. 시집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우리’는 불가능한 미래의 기호이다. 격절과 고립의 시공을 넘어서기 위해 시집 도처에서 결핍과 불우의 ‘우리’가 아프게 빛난다. 식탁 앞에서 혼잣말을 하며 “내게 없는 사람”을 향해 기울어진 존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들로 반짝”이며 “점 하나가 붙잡고 있는 세계”를 견뎌내는 중이다. “나는 파주 안에 있고 나는 파주 밖에 있으”면서 “융성해지는 폐허”. 그 역설의 공간을 온몸으로 살아내며 시적 주체는 “나 없이도 식탁은 식탁”인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존재의 은밀한 비의와 오뇌가 연과 연, 행과 행 사이 그 무한의 자리에 무형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지금 이곳에서 미지의 강역을 비추는 순정한 ‘별빛’ 결정체이다. -홍일표 시인 추천사.
기본정보
ISBN | 9788927809067 | ||
---|---|---|---|
발행(출시)일자 | 2017년 12월 11일 | ||
쪽수 | 128쪽 | ||
크기 |
126 * 205
* 13
mm
/ 181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문예중앙시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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