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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의 '명화읽기'] 바람의 아들, 바람의 연인이 되어라 - 세상을 품은 예술가들
교보문고 문화서비스| 2015/06/29 | 조회 : 1648 트위터 facebook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는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八割)이 바람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유안진의 시 <자화상>에도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 시인은 하필 자신을 바람의 아들 혹은 바람의 연인에 비유한 것일까. 과연 시인에게 바람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문학평론가들에 따르면 바람이란 시련과 고통, 방랑과 방황, 도전과 반항,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바람이란 곧 자유라고. 왜냐하면 예술가의 DNA는 자유이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고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하건만 예술인들은 바람처럼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유를 만끽한다. 즉 일탈을 꿈꾸는 영원한 자유인이 바로 예술가라는 뜻이다. 20세기 서양 미술사를 펼치면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그룹은 ‘에콜드 파리’이다.
 
에콜(ecole)이란 프랑스어로 학교, 학파를 뜻하니 파리파()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는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 파리의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에서 살았던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파리는 자유와 지성의 광채를 발산하는 거대한 등불이었고 예술가들은 찬란한 불빛에 매혹당해 달려드는 나방이었다. 글로벌 예술가의 원조인 ‘에콜드 파리’의 대표적인 화가는 모딜리아니(이탈리아)·수틴(리투아니아)·키슬링(폴란드)·샤갈(러시아)·파스킨(불가리아)·고틀리브(폴란드)·후지타(일본)·민싱(우크라이나) 등이 있다.
각기 다른 국적의 다문화 예술인들은 고유의 민족성과 프랑스적 감수성을 혼혈한 독특한 화풍을 창안했다. 그럼 에콜드 파리의 대표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보도록 하자. 


하나_모딜리아니 

파이프를 든 남자, 모딜리아니 (1918 / 캔버스에 유채 / 92X60cm)
 
미술애호가들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고백한다.
이 초상화를 보면 왜 그를 ‘우수의 화가’라고 부르는지 깨닫게 된다. 늙은 남자가 파이프를 손에 쥔 채 어딘가를 바라본다. 화가는 인물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대신 단순하게, 색깔도 몇 가지로 제한해 표현했다. 독특한 점이란 노인의 얼굴과 코와 목을 길게 늘였다는 것, 게다가 아몬드 형태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눈이다.

눈은 인간의 감정과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거울이니까. 그래서 화가들은 눈을 묘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가. 오죽하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을까. 그런데도 모딜리아니는 인물의 눈동자를 지워버렸다. 
 
노인의 시선은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두 눈에 푸른 색 커튼을 치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노인은 화가 자신이다.
당시 모딜리아니의 심정도 이처럼 쓸쓸했다. 몽마르트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화가 중 하나로 손꼽혔건만 그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황폐해졌다. 타국에서의 부초 같은 삶, 지긋지긋한 가난과 병마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큼 민감했던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술과 마약에서 도피처를 찾았던 화가는 36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화가의 친구였던 러시아의 시인 엘리아 에렌부르그는 고독한 천재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이렇게 해서 전설은 생겨났다. 가난하고 언제나 술에 취해있는 환쟁이. 최후의 보헤미안. 술집을 떠돌며 가끔은 이상한 초상화를 그리고 가난 속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 유명해진 남자.
 
_카임 수틴

The Village Idiot, 수틴 (1919년 / 캔버스에 유채 / 92X65cm)
 
리투아니아 출신인 수틴은 모딜리아니의 친구였다. 모딜리아니가 수틴의 초상화를 여러 점이나 그렸을 정도로 두 화가는 절친했건만 외모나 성격은 너무도 달랐다. 모딜리아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도니스처럼 꽃미남이며 낡은 외투를 입고도 귀티가 흘렀건만 수틴은 못생긴데다 거렁뱅이 취급을 당할 만큼 옷차림이 지저분했다. 그의 귓속에서 빈대가 들끓어 의사가 기겁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으니.

모딜리아니는 술 한 잔만 사주면 그림을 주었고,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호주머니를 털 만큼 마음이 여렸던 반면 수틴은 거칠고 격정적이었다.  

소설가 ‘단 프랭크’에 따르면 수틴은 야생동물이었다. 그는 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벼룩시장에서 싸구려 그림들을 사서 그 위에 작업했다.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완성한 순간 그 자리에서 칼로 그어버렸다. 동료들이 그림을 비판할 때도, 전람회에서 호평을 받지 못할 때도 작품을 파괴했다. 그래서 화가들은 이런 귓속말을 주고받곤 했다.
“수틴의 그림을 비판해선 안 돼. 그림을 산산조각 내거든. 
 
이런 난폭한 기질은 그림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모딜리아니의 인물은 정물처럼 조용하지만 수틴의 인물은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모델의 사지는 뒤틀리고, 붓 터치는 소용돌이치고,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덧칠한 물감덩어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참혹한 현실도 그의 거친 성격에 불을 질렀다. 유태인이며 무국적자였던 수틴은 게슈타포의 체포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오랜 도피생활을 했다. 화가는 늘 쫓기면서 목숨을 위협받았던 시절의 불안과 두려움, 세상을 향한 분노와 증오심을 그림에 쏟아 부은 것이다.
 
_키슬링
누드, 키슬링 (1933 / 캔버스에 유채 / 98X195cm)
 
폴란드 출신인 키슬링도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모델이 되었을 만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키슬링은 삶의 쾌락을 추구하는 열정의 화가였다
 
유분방하고 자극적인 파리의 분위기를 사랑했던 그는 살아 있는 날들을 즐겼다. 그가 얼마나 기분파이며 충동적인지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어느 날 키슬링은 100프랑을 주고 꽃을 산 다음 술집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들에게 꽃을 던져주었다. 애인이 아닌 뭇 여성들에게 단지 꽃을 던지는 즐거움을 위해 큰돈을 낭비하는 멋쟁이 친구가 부러웠던지 모딜리아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키슬링은 나처럼 가난뱅이지만 백 프랑을 던져버리는 즐거움을 위해 꽃을 샀어.
 

 
(왼쪽) 모딜리아니, 수틴의 초상 (1915 / 캔버스에 유채 / 36X27.5cm)
(오른쪽) 모딜리아니, 키슬링의 초상 (1915 / 캔버스에 유채 / 37X28cm)
 

이렇게 ‘에콜드 파리’의 개성적인 세 화가를 만났다. 이들은 드넓은 세계를 가슴에 품기 위해 정든 둥지를 떠나 바람의 아들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평범한 우리도 예술가들처럼 바람의 아들, 바람의 연인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탐욕으로 비대해진 영혼을 다이어트하면, 붙잡고 움켜쥐는 대신 놓아주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면…. 


|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그림 읽는 CEO』 저자)
 
 
※ 본 칼럼은 <북뉴스>(http://news.kyobobook.co.kr)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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